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98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유대인들에게 개는 부정한 짐승을 대표합니다. 깨끗한 짐승은 되새김질하고 발이 갈라진 것들입니다.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은 기가 막힐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는 오히려 충견 이미지가 강하지 않습니까. 특별 교육을 받은 개들은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주기도 하고요. 유대인들이 개를 부정한 짐승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역사적 경험이 있겠지요. 본문에서는 부정한 사람들을 개로 비유한 겁니다. 점술가는 인간의 욕망을 사술(詐術)이나 사술(邪術)로 충족시키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요즘 우리의 경우로 말하면 부동산 투자로 천문학적 불로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부추기는 이들이겠지요. 그 외에도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은 모두 구원에서 배척된다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명을 파괴한다는 사실입니다. 살인자들과 거짓말쟁이를 한 묶음으로 보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도 살인자들만이 아니라 친구를 욕하는 사람도 살인자나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실제로 간음한 자만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행동도 기계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가 어린 딸이 걱정할까 걱정되어서 그 사실을 숨기거나 암이 아니라고 거짓으로 말할 수 있으니까요. 또는 조폭들에게 쫓기는 사람을 보았으나 조폭들이 물었을 때 모른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요.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에서 중요한 것은 생명 지향성입니다. 무엇이 생명 지향성인지도 저절로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생명 지향적 감수성과 이해도에 따라서 차이가 나긴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그 생명 지향성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에서 나옵니다. 어두운 숲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 나침반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차이처럼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있는 사람은 삶의 과정에서 실수가 있더라도 다시 그 생명의 빛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개들은 부정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빌 3:2). 본능에만 이끌려 사는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잠 26:11, 마 7:6, 벧후 2:22) 말입니다.
만약 진짜 개라면 왜 다른 짐승들은 말하지 않았을까요?
개들만 빼고 되새김질하고 발이 갈라진 것들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다는 말이 되니 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