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403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전체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한 구절을 뽑으라고 한다면 22:20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상응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찬양이 나오니까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문구가 고린도 교회 예배문에서는 아람어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아람어 ‘마라나타’(고전 16:22, Μαράνα θά)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문구는 당시 많은 교회에서 광범위하게 예배 의식문으로 사용된 것처럼 보입니다.(계 3:11절 참조)
이 구절을 실감 나게 읽으려면 요한계시록을 회람해서 받아 읽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순교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각 지역에 퍼져있는 교회 지도자들의 순교 소식을 들으면서 얼마나 긴장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로마의 황제숭배라는 정치 사회적 상황 앞에서 절망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겠지요. 교회 내부에서는 배교자도 나왔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 그런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재림 신앙이 그들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찬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과 거리가 먼 상황에서 사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오히려 불행한 처지에 놓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상황은 기원전 6세기에 벌어진 유대 민족의 바벨론 유수와 비슷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로마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바벨론이라고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몇 년간 대치하던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왕궁과 가옥이 불에 탔고,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귀한 집기류는 약탈당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고 노예가 되었으며 지도급 인사들은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자신들의 비참한 운명 앞에서 그들은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여호와 신앙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러나 일부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묵시 사상이 싹이 트고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은 너무 강하고 악해서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 심판을 감행할 이가 바로 우리말 성경이 인자(人子)로 번역한 그리스어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사람의 아들)입니다. 묵시 사상의 핵심은 세상을 심판하고 정의롭게 만들 인자가 오신다는 믿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묵시 사상이 말하는 인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가 속히 다시 오실 겁니다. 그래야만 악한 세상은 심판받고 정의로운 세상이 새롭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림 신앙이 21세기 오늘날도 유효한가요? 이 질문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세계관과 지금의 세계관 사이에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천동설이 대세였습니다. 신화적인 세계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진화론과 양자역학과 인터넷과 인공지능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예수의 재림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제자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임박한 종말론’입니다. 그런 희망을 품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죽기 시작하자 교회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바로 예수의 재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에 관한 신학적 문제는 아직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했습니다. 재림 신앙의 역동성은 21세기 교회 안에서 느슨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신앙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 괴리가 있습니다.
저는 재림 신앙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과 그의 약속과 그의 운명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는 현대인들이 알아듣도록 끊임없이 해명하고 변증해야겠지요.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따르면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야만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 보혜사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위로의 영인 보혜사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예수 재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 죄와 의와 심판이 실현되는 때를 가리켜서 재림의 때라고 말해도 되겠고요. 물론 이런 관점이 정통 신학계 안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 재림이 2천 년 전 유대인 한 남자의 형상으로,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방식으로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지 예수 재림 문제는 생각할수록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주변 그리스와 로마 문명권 앞에서 자신을 변증하려고 최선을 다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