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404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22장이고 404구절로 구성되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이런 정도의 분량을 양피지에 기록하려면 내용도 내용이지만 물리적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우리는 마지막 절 앞에 섰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심정입니다. 사백사 구절을 다 읽고 설명했는데도 여전히 모르는 게 많기도 하고, 보충해야 할 말이 많기도 합니다. 이 구절들이 각각 종말론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요한계시록 표상으로 말하면 예수의 속히 오심이 현실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 말씀은 연구되고 해석되어야겠지요.
21절은 간략한 문장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고전 16:23절도 이와 비슷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고전 16:22절에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문장이 나온 것처럼 계 22:20절에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나왔습니다. 요한계시록과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문장 형식이 비슷합니다. 이런 형식이 당시 교회 문서에서 일반적이었는지, 요한계시록과 고린도전서만 비슷한 건지, 또는 어쩌다가 이렇게 비슷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오심과 예수의 은혜가 한데 묶인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사본에 따라서 약간 다릅니다. 어떤 사본에는 우리말 성경에 나온 대로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호 카리스 투 퀴리우 예수)으로 나오고, 어떤 사본에는 괄호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덧붙여지기도 합니다. 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Χριστοῦ)로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큰 상관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Κυρίος)이시고 그리스도(Χριστὸς)이시니까요.(마 16:16 참조) 주 예수의 은혜는 신약성경 전체의 압축 파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은혜의 통로이기도 하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은혜 자체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이미 1:5절에서 그 은혜를 평화와 함께 언급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요한은 예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자는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하는 구분 없이 실제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걸까요?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이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한다면 그의 보편적 구원 능력이 축소되기 때문입니다. 만인 구원이 옳은지, 선택적 구원이 옳은지에 관한 논란은 여기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인 구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궁극적인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인 구원을 이유로 지금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믿지 않으면 구원에서 영원히 배척당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장 적나라한 표현으로, 지옥 불구덩이 안으로 떨어질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이 지금 우리 삶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지옥에 계신다면 자기도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선택적 구원이 잘못된 가르침도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서 약간의 긴장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떤 사본에는 우리말 성경의 각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모든 자들’이 아니라 ‘성도들’로 나옵니다. 어떤 사본이 옳은지는 우리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 예수의 은혜가 우리 그리스도인과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일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널리 전해야겠지요.
‘일흔 살에 다시 읽는 요한계시록’을 끝내면서 요한의 문장을 흉내 내는 걸 용서하십시오. 저의 마음을 담아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저의 글을 읽는 모든 분에게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목사님,
제가 낸 숙제 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역시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나름 대로 두 번이나 계시록을 해설해 보았는데
역시 목사님의 수준에는 발 뒤꿈치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만큼이나 그 갭이 크게 느껴집니다.
9단과 9급 차이만큼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