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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8일 깃들 곳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2)
신약학자들의 일부 견해에 따르면 오늘 본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비록 작은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들었으며, 또한 모여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지금 큰 나무와 같습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아무리 쇄락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종교이며, 남북 아메리카도 개신교와 가톨릭이 중심 종교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상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큰 나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미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주춤했지만, 그리고 개별 교회의 편차가 심하긴 하지면 전체적으로 8백만 명 정도가 개신교 교인들이고 5백만 명 정도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라는 건 기독교의 힘이 한국사회 안에서 막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기독교라는 나무에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게 하는 것이겠지요. 나무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작업보다는 나무의 그늘을 만드는 일이 더 시급하고도 본질적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우선 영성의 심화가 중요합니다. 신학적인 깊이와 생명 운동의 실천이 어우러지는 영성이 심화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신자들이 거룩성을 경험할 수 있는 예전과 교회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에 근거해서 소수자들에게 조금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접근해야겠지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시혜가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존재론적 근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쉴 수 있는 영적인 그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2)
신약학자들의 일부 견해에 따르면 오늘 본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비록 작은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들었으며, 또한 모여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지금 큰 나무와 같습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아무리 쇄락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종교이며, 남북 아메리카도 개신교와 가톨릭이 중심 종교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상황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큰 나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미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주춤했지만, 그리고 개별 교회의 편차가 심하긴 하지면 전체적으로 8백만 명 정도가 개신교 교인들이고 5백만 명 정도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라는 건 기독교의 힘이 한국사회 안에서 막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기독교라는 나무에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게 하는 것이겠지요. 나무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작업보다는 나무의 그늘을 만드는 일이 더 시급하고도 본질적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우선 영성의 심화가 중요합니다. 신학적인 깊이와 생명 운동의 실천이 어우러지는 영성이 심화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신자들이 거룩성을 경험할 수 있는 예전과 교회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에 근거해서 소수자들에게 조금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접근해야겠지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시혜가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존재론적 근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쉴 수 있는 영적인 그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에는 이렇게 새들이 깃들일 만한 큰 겨자나무는 없답니다.
겨자나무는 사람들의 키만하거나 조금 큰 관목이랍니다.
그래서 이걸 비정상적 성장이라고 보는 거지요.
말세가 되면 교회의 비정상적 성장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브니엘 남 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니,주님의 같은 비유에서도 새는 악한 것을 지칭했으니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전에 웨스트민스트에 있었던 캠벌몰간과
미국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 담임 목사였던
이름이...아마 위런 위어스비 로 기억하는데 이런 분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으로도 오늘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런 해석이 더 와 닿는군요.
팔레스틴에는 이렇게 새들이 깃들일 만한 큰 겨자나무는 없답니다.
겨자나무는 사람들의 키만하거나 조금 큰 관목이랍니다.
그래서 이걸 비정상적 성장이라고 보는 거지요.
말세가 되면 교회의 비정상적 성장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브니엘 남 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니,주님의 같은 비유에서도 새는 악한 것을 지칭했으니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전에 웨스트민스트에 있었던 캠벌몰간과
미국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 담임 목사였던
이름이...아마 위런 위어스비 로 기억하는데 이런 분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으로도 오늘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런 해석이 더 와 닿는군요.
말 나온 김에 이런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의 성장은 분명 절대적으로 옳고 필요한데
그것이 개 교회의 성장개념으로만 이해되어서
교회성장학이 개교회의 전략으로만 이해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과론적인 면에서도 개교회의 지나친 비대함이
신앙적으로 유익한 것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번씩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개교회의 사이즈가 커져서 얻는 신앙인들의 유익이 뭔가를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도요.
물론 어느 정도의 사이즈가 정상인가는 답하기 쉽지 않겠지만
오늘날처럼 이렇게 무조건 큰것이 잘하는 것이란 생각은
너무나 비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분명 절대적으로 옳고 필요한데
그것이 개 교회의 성장개념으로만 이해되어서
교회성장학이 개교회의 전략으로만 이해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과론적인 면에서도 개교회의 지나친 비대함이
신앙적으로 유익한 것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번씩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개교회의 사이즈가 커져서 얻는 신앙인들의 유익이 뭔가를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도요.
물론 어느 정도의 사이즈가 정상인가는 답하기 쉽지 않겠지만
오늘날처럼 이렇게 무조건 큰것이 잘하는 것이란 생각은
너무나 비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첫날처럼님, 제가 마 13장의 해석을 안하려고 했는데 조금은 해석을 해 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온전한 지는 모르겠지만.
마 13장에서 처음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 말씀을 씨로 뿌렸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으니"란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비유에서 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으니"란 말씀이 나옵니다. 즉 그 때는 이미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형성되었지요.
그러나 조금 있다가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형성된 그 곳에 원수 사탄이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가라지 뿐만 아니라 공중의 새들, 즉 악한 자들 까지도 교회 안에 깃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고요. 그 다음에 교회는 부풀려 져서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부패한-누룩과도 같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를 더 부수적으로 말씀드리면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한 장 안에서 같은 것이 하나는 긍정적으로 하나는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 13장의 비유는 계시록에서의 7교회의 변천사와 너무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 해석의 방법도 있구나 참고 하세요.
믿음 안에서의 형제된 사람이......
마 13장에서 처음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 말씀을 씨로 뿌렸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으니"란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비유에서 부터는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으니"란 말씀이 나옵니다. 즉 그 때는 이미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형성되었지요.
그러나 조금 있다가 초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형성된 그 곳에 원수 사탄이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가라지 뿐만 아니라 공중의 새들, 즉 악한 자들 까지도 교회 안에 깃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고요. 그 다음에 교회는 부풀려 져서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부패한-누룩과도 같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를 더 부수적으로 말씀드리면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한 장 안에서 같은 것이 하나는 긍정적으로 하나는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 13장의 비유는 계시록에서의 7교회의 변천사와 너무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 해석의 방법도 있구나 참고 하세요.
믿음 안에서의 형제된 사람이......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가 그런 식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건 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런 식의 비극적 결말... 교회사가 결국 그렇게 흘러갔고 또한 그걸 증명한다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본질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사후예언적(事後預言的) 해석이랄까... 그런 느낌이 드네요... 단순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느껴지기도 하구요...
저는 시적으로,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이해하고 싶군요...
그리고 각 장(chapter)과 절(verse)의 구별이 성서에 원래부터 존재한 건 아니고 사용상의 편의를 위해서 붙인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몇 가지 주제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같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두 비유는 서로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는 개별 비유로 보이거든요...
본질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사후예언적(事後預言的) 해석이랄까... 그런 느낌이 드네요... 단순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느껴지기도 하구요...
저는 시적으로,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이해하고 싶군요...
그리고 각 장(chapter)과 절(verse)의 구별이 성서에 원래부터 존재한 건 아니고 사용상의 편의를 위해서 붙인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몇 가지 주제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같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두 비유는 서로 독립적인 가치를 가지는 개별 비유로 보이거든요...
브니엘남님의 자신 있으신 해석(마13장~)을 읽고 보니
님께서는 정말 <성경 해석학>공부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성경관이나 해석의 기초가 다른 환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니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브니엘남님!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님을 탓하자는게 아닙니다.
어느 면에선 존경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님이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신 분이 아닌가 경계도 했었지만,
이 공간에서 티격태격 하다보니 정(?)도 들고
그렇게 유치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잠시 얘기가 빗나갔네요.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눅13:20~21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신비하고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얘기 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변혁적이고 혁명적인 뭐 그런...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첫날>님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집니다.
님께서는 정말 <성경 해석학>공부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성경관이나 해석의 기초가 다른 환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니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브니엘남님!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님을 탓하자는게 아닙니다.
어느 면에선 존경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님이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신 분이 아닌가 경계도 했었지만,
이 공간에서 티격태격 하다보니 정(?)도 들고
그렇게 유치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잠시 얘기가 빗나갔네요.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눅13:20~21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신비하고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얘기 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변혁적이고 혁명적인 뭐 그런...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첫날>님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집니다.
작은 겨자씨가 새가 그 그늘에서 깃들일 만큼 자란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때에 우리처럼 땅을 파고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고, 살짝 뿌리는 것으로 씨앗을 심는 다면 ,씨앗을 먹이로 삼는 새는 겨자씨에게는 그야말로 원수일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자씨가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고 자기(혹은 동료)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던 새까지 품을 정도로 넒고 넉넉하게 자라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 아닐까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예수님의 교훈을 적용해 본다면,
결국 겨자씨가 자란다는 의미는 크기 보다는 깊이, 넓이의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씨앗이 자랄 수록 '다름'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져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요......
결국 겨자씨가 자란다는 의미는 크기 보다는 깊이, 넓이의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씨앗이 자랄 수록 '다름'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져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요......
나물이 커서 큰 나무가 됨: 비정상적인 성장, 기능 상실(창 1:12);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비정상적인 성장과 기능 상실, 이는 작금의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이는 딤후 2장 20절의 큰 집과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새들: 악한 자(막 4:4)
그러므로 나무도 비정상적이고 새들도 악한 자들을 의미함으로 사람이 쉴 수 있는 영적인 그늘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