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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11일 오병이어 (48)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지금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을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설명이 본문에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할 분들이 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대하든지 그것을 성서 전체와 연관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 텍스트는 그것만으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속한 마가복음 전체와 연결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복음서 및 신약성서 전체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게 아닙니다. 구약의 관점과 2천년 기독교 역사 전체와도 연결됩니다. 이는 흡사 한 장의 낙엽을 연구하려면 그 개체 낙엽만이 아니라 그 나무 전체, 그리고 식물 및 생명현상 전체를 그 배경으로 놓아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묵상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성서공부에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개론의 관점을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개론(introduction)은 기본 방향(orientation)입니다. 마가복음 및 신약성서의 기본 방향을 알아야만 우리는 구체적인 본문 앞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서공부와 설교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개는 텍스트의 부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마저 거의 대부분 주관성에 빠져버립니다. 성서를 해명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성서텍스트를 지배하게 되면, 결국 말씀의 고유한 객관성이 죽어버립니다.
성서개론이나 말씀의 객관성보다는 말씀에서 은혜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남편의 사랑을 늘 확인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아내처럼 우리는 지금 거의 신경증적으로 은혜일원론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관적 신앙과 은혜체험을 뛰어넘는 성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남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몰두하다가 결국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여자들과 비슷할지 모르겠군요.
다 배불리 먹고 (막 6:42)
지금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을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관한 생각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설명이 본문에서 너무 멀리 나가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할 분들이 있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대하든지 그것을 성서 전체와 연관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병이어 텍스트는 그것만으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속한 마가복음 전체와 연결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복음서 및 신약성서 전체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게 아닙니다. 구약의 관점과 2천년 기독교 역사 전체와도 연결됩니다. 이는 흡사 한 장의 낙엽을 연구하려면 그 개체 낙엽만이 아니라 그 나무 전체, 그리고 식물 및 생명현상 전체를 그 배경으로 놓아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묵상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성서공부에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개론의 관점을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개론(introduction)은 기본 방향(orientation)입니다. 마가복음 및 신약성서의 기본 방향을 알아야만 우리는 구체적인 본문 앞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서공부와 설교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개는 텍스트의 부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마저 거의 대부분 주관성에 빠져버립니다. 성서를 해명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성서텍스트를 지배하게 되면, 결국 말씀의 고유한 객관성이 죽어버립니다.
성서개론이나 말씀의 객관성보다는 말씀에서 은혜 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남편의 사랑을 늘 확인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아내처럼 우리는 지금 거의 신경증적으로 은혜일원론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관적 신앙과 은혜체험을 뛰어넘는 성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남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몰두하다가 결국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여자들과 비슷할지 모르겠군요.
모래알 님,
가끔 일일 드라마에서 나오는 현상들이잖아요.
사실 사람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는데,
그걸 요구하다가 실망하든지 속는 거겠지요.
그래도 뭐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그런 거나마 없으며
조금 심심하겠지요.
미국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더군요.
조선 사람은 속으로 삼키는데 말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답니다.
자꾸 그런 말을 하다보면 정말 사랑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을지 모르지요.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고...
우리 민족도 신파에 강하기는 하지만이요.
구도자 님,
은혜체험의 면역이라...
재미있고 정확한 표현이군요.
사랑은 우리 내면의 독자적인 능력이 아니라
창조, 부활, 종말의 영이 활동하는 생명의 능력이겠지요.
여전히 우리가 다 따라잡을 수 없는 그분의 신비한 힘이겠지요.
좋은 하루!!
가끔 일일 드라마에서 나오는 현상들이잖아요.
사실 사람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없는데,
그걸 요구하다가 실망하든지 속는 거겠지요.
그래도 뭐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그런 거나마 없으며
조금 심심하겠지요.
미국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더군요.
조선 사람은 속으로 삼키는데 말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답니다.
자꾸 그런 말을 하다보면 정말 사랑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을지 모르지요.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고...
우리 민족도 신파에 강하기는 하지만이요.
구도자 님,
은혜체험의 면역이라...
재미있고 정확한 표현이군요.
사랑은 우리 내면의 독자적인 능력이 아니라
창조, 부활, 종말의 영이 활동하는 생명의 능력이겠지요.
여전히 우리가 다 따라잡을 수 없는 그분의 신비한 힘이겠지요.
좋은 하루!!
성서는 해석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할 신앙의 책입니다. 신앙의 책을 신앙없는 사람이 올바로 해석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신앙없이 성경을 분석하는 일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종교학자지요.
성서의 기적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너무 많지요. 또 열성적으로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현실가운데 신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생활이 참 재미있고 활력이 넘칩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서의 기적을 사실로 믿지 못하고 그저 '그 어떤 것'에 대한 해석으로, 신앙의 표현으로만 해석하시는 분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일, 그것이 참 기적같은 일입니다.
성서의 기적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너무 많지요. 또 열성적으로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현실가운데 신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생활이 참 재미있고 활력이 넘칩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서의 기적을 사실로 믿지 못하고 그저 '그 어떤 것'에 대한 해석으로, 신앙의 표현으로만 해석하시는 분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일, 그것이 참 기적같은 일입니다.
정목사님!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남편'은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못하는 남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대한민국 남성의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해요.
그런 남편과 살다보면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나', '저 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불안한 생각들이 절로 들것 같지 않으신가욤?
이런 의미에서 드라마는 아줌마들의 동병상련, 측은지심을 아주 교묘하게 잘 건드리는 류들이 많지요.
(일일 드라마의 전형적인 설정에 대한 비판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불안에 떠는 아내의 막무가내식 관계 확인 방법이 좋은 것은 분명아닙니다.
하지만 모래알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남편들'도 분명 문제가 있지요.
부부가 서로의 감정이 소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야 하는 게 정석 아닐런지요.
소통의 문제는 부부가 한마음 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아니겠어요?
목사님은 '남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몰두하는 아내'들을
'신경증적으로 은혜일원론에 빠져버린'이들에 비유하셨지요?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줌마들을 좀 더 긍휼한 시각으로 봐 주셔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남편'은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못하는 남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대한민국 남성의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해요.
그런 남편과 살다보면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나', '저 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불안한 생각들이 절로 들것 같지 않으신가욤?
이런 의미에서 드라마는 아줌마들의 동병상련, 측은지심을 아주 교묘하게 잘 건드리는 류들이 많지요.
(일일 드라마의 전형적인 설정에 대한 비판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불안에 떠는 아내의 막무가내식 관계 확인 방법이 좋은 것은 분명아닙니다.
하지만 모래알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남편들'도 분명 문제가 있지요.
부부가 서로의 감정이 소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야 하는 게 정석 아닐런지요.
소통의 문제는 부부가 한마음 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아니겠어요?
목사님은 '남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몰두하는 아내'들을
'신경증적으로 은혜일원론에 빠져버린'이들에 비유하셨지요?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줌마들을 좀 더 긍휼한 시각으로 봐 주셔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어요.
늘 확인하려는 것도 문제지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남편들도 문제라고 생각되는데요, 제게는? ㅎㅎ
감사드리며 좋은 날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