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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14일 유령인가?(3)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막 6:49)
성서 텍스트는 해석되어야 한다는 저의 주장이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르겠군요. 모든 게 해석되어야 한다면 결국 성서의 중심까지 해체되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그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무조건 제거하자는 게 아니라, 즉 불트만 식으로 탈(脫)신화화하자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담아내려는 구원의 현실들을 바르게 찾자는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경험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경험은 처음부터 고정된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그 경험도 역시 깊어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여기 젊어서 남편을 잃은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의 많은 경험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경험들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합니다. 이 여자가 삶의 깊이로 들어간 만큼 그 경험의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경험 중에서 정말 이상한 것도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초능력을 발휘했다는 유언비어도 많았습니다. 한 인물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경배의 대상으로 고양되면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위경에 속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모두 배격하고 권위 있는 전승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일부를 배격하고 일부를 받아들인 과정이 신학 작업, 즉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병행구인 마태복음 14:22-33절에는 물위를 걷다가 빠진 베드로를 예수님이 건져냈다는 내용이 첨가되었습니다. 만약 복음서의 보도가 신학적인 해석이 아니라 단순하고 건조한 사실전달에 불과했다면 이런 차이가 생길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막 6:49)
성서 텍스트는 해석되어야 한다는 저의 주장이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르겠군요. 모든 게 해석되어야 한다면 결국 성서의 중심까지 해체되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그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의 신화적 요소를 무조건 제거하자는 게 아니라, 즉 불트만 식으로 탈(脫)신화화하자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담아내려는 구원의 현실들을 바르게 찾자는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경험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경험은 처음부터 고정된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그 경험도 역시 깊어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여기 젊어서 남편을 잃은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의 많은 경험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경험들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합니다. 이 여자가 삶의 깊이로 들어간 만큼 그 경험의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경험 중에서 정말 이상한 것도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초능력을 발휘했다는 유언비어도 많았습니다. 한 인물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경배의 대상으로 고양되면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위경에 속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모두 배격하고 권위 있는 전승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일부를 배격하고 일부를 받아들인 과정이 신학 작업, 즉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병행구인 마태복음 14:22-33절에는 물위를 걷다가 빠진 베드로를 예수님이 건져냈다는 내용이 첨가되었습니다. 만약 복음서의 보도가 신학적인 해석이 아니라 단순하고 건조한 사실전달에 불과했다면 이런 차이가 생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상성 박사님이 쓰신 "추락하는 한국교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한국교회의 폐단에 대해서 잘 지적하고 계시더군요. 여러 가지를 지적하셔서 한마디로 압축할 수는 없을 것 같구요. 다만, 성서해석의 문제와 연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일종의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성서해석을 해야한다는 입장을 펴시더라구요.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설"에 대한 해석을 보면, 복음서에서 동정녀 탄생설과 족보를 함께 실은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을 안고 있다고 말합니다. 동정녀 탄생설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족보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실은 것일터인데, 이런식의 해석이, 그렇다면 결국에 기독교 신앙의 토대인 "부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부활도 일종의 신화라고 생각하고 탈신화화해야하는 건지, 또는 과학과의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부활 자체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물론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거라는 것을 알지만, 부활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의문이 들 뿐더러, 더 나아가,부활 또한 초대교회의 신학적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인지 의문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