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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20일 씨 (8)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막 4:3)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씨의 영적인 의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어떤 결실을 맺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선 성서를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문자에 한정되는 건 아닙니다. 이미 계시 사건이 있으며, 선포도 있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큰 의미에서 말씀입니다. 근본적으로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도 합니다. 로고스가 태초의 창조 사건에 개입했다는 요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하나님, 예수, 말씀은 이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동일한 근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를 우선 말씀으로 보고 이야기 합시다. 씨와 마찬가지로 성서말씀도 역시 진리를 은폐의 형식으로 담지하고 있습니다. 성서 안에는 진리가, 즉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성서가 계시 자체는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계시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릇이 없으면 계시도 없기 때문에 그릇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무엇이 그릇이고 무엇이 계시인지를 구분하기를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성서구절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통교회 안에서도 성서를 받아들이는 입장들이 서로 다릅니다.
성서에서 계시를, 즉 진리를 포착하는 것이 곧 성서연구이고 설교입니다. 성서연구와 설교가 바르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장되는 건가요? 씨와 꽃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쪽의 전문가가 되어야하듯이 성서와 진리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이런 전문적인 작업을 해석학이라고 합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막 4:3)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씨의 영적인 의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어떤 결실을 맺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선 성서를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문자에 한정되는 건 아닙니다. 이미 계시 사건이 있으며, 선포도 있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큰 의미에서 말씀입니다. 근본적으로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도 합니다. 로고스가 태초의 창조 사건에 개입했다는 요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하나님, 예수, 말씀은 이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동일한 근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를 우선 말씀으로 보고 이야기 합시다. 씨와 마찬가지로 성서말씀도 역시 진리를 은폐의 형식으로 담지하고 있습니다. 성서 안에는 진리가, 즉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성서가 계시 자체는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계시를 담은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릇이 없으면 계시도 없기 때문에 그릇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무엇이 그릇이고 무엇이 계시인지를 구분하기를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성서구절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통교회 안에서도 성서를 받아들이는 입장들이 서로 다릅니다.
성서에서 계시를, 즉 진리를 포착하는 것이 곧 성서연구이고 설교입니다. 성서연구와 설교가 바르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장되는 건가요? 씨와 꽃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쪽의 전문가가 되어야하듯이 성서와 진리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생명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이런 전문적인 작업을 해석학이라고 합니다.
해석학적 토대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성서로 밥먹는 사람들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건 없겠지요.
우리만이 아니라 물리학자들도 역시 해석학적 토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서 조금씩 그 실체가 드러나는 퍼즐과 같군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퍼즐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없다는 겁니다.
퍼즐 한 조각을 쳐다보기에도 숨이 가쁩니다.
내 한 몸 추스리며 살기도 힘겨운 거겠지요.
그런데 전체 퍼즐을 맞추어야 한다니,
깜깜합니다.
그래서 천천히 생각하다보면
퍼즐 한 조각이 놓여야 할 자리가 어딘지
조금은 감이 잡힙니다.
다행히 정확하게 퍼즐 조각을 맞춘 분이 있기에
우리가 조금 흉내를 내고 살아갑니다.
이런 게 다 해석이겠지요.
성서로 밥먹는 사람들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건 없겠지요.
우리만이 아니라 물리학자들도 역시 해석학적 토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서 조금씩 그 실체가 드러나는 퍼즐과 같군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퍼즐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없다는 겁니다.
퍼즐 한 조각을 쳐다보기에도 숨이 가쁩니다.
내 한 몸 추스리며 살기도 힘겨운 거겠지요.
그런데 전체 퍼즐을 맞추어야 한다니,
깜깜합니다.
그래서 천천히 생각하다보면
퍼즐 한 조각이 놓여야 할 자리가 어딘지
조금은 감이 잡힙니다.
다행히 정확하게 퍼즐 조각을 맞춘 분이 있기에
우리가 조금 흉내를 내고 살아갑니다.
이런 게 다 해석이겠지요.
'해석학적 토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