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7일 생베 조각

조회 수 3314 추천 수 16 2006.09.27 23:18:14
2006년 9월27일 생베 조각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인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막 2:21)

21절의 생베 조각과 22절의 새 포도주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격언입니다. 성서 기자는 이런 격언을 통해서 예수님과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묶어 놓으면 한쪽이 손상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손상되는 쪽은 유대교와 그 가르침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얼마 안가 낡은 옷이 해어지고 말듯이 말입니다. 아주 리얼한 표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옷을 기워 입는 일이 많았습니다. 약간 해어졌을 때는 그저 실로 간단히 꿰매면 됐지만, 해어진 부분이 넓으면 다른 헝겊을 대고 기워야했습니다. 옷만이 아닙니다. 양말도 기워 신었습니다. 내 어릴 때 기억으로는 저녁밥을 먹은 다음에 어머니가 흐린 불빛 아래서 우리들의 양말을 꿰매는 일이 흔했습니다. 양말은 대개 이음새가 뜯어지는 게 아니라 일정한 부분이 닳아버리기 때문에 그냥 꿰맬 수는 없었습니다. 양말 속에 못 쓰는 전구를 넣고 해어진 부분을 드러나게 한 다음, 실로 짜깁기를 하듯이 꿰매야했습니다. 제 눈에 그게 무척 재미있게 보였는지, 저도 어머니를 따라 바느질을 여러 번 해보았습니다. 촉수 낮은 전깃불, 끊어진 전구, 해어진 양말, 바늘, 여러 색깔의 실패, 그리고 바느질하시는 어머니, 이런 모습이 오래된 사진첩처럼 제 기억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패러다임 쉬프트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천동설에 묶인 사람은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듯이 유대교는 예수님의 복음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신앙도 이렇게 자기 도그마에 묶여서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레벨:11]권현주

2006.09.28 10:53:02

일상의 기쁨을 놓치지않으면서
일상에 갇히지않고,
자기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면서도
그것에 갇히지않는,

그래서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늘 열려있는 자신을 유지하는 방법은...

[레벨:4]New York

2006.09.28 16:02:46

일상의 기쁨을 진실로 놓치지않으면 일상에 갇힐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일상에 갇히지 않는 자만이 일상의 기쁨을 진실로 놓치지않습니다. 막연히, 적당히 일상의 기쁨을 즐기면서, 즉 의심이라는 거리로 안전하게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고 생각하면서는 생명의 기적이 산재해있는 일상의 진실한 기쁨을 놓칩니다. 생명의 기적이 얼마나 기적인가를 아는 자는 예수님의 출현이 얼마만큼의 기적임을 안다는 애씀없이도 알고 그 전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믿음을 주십니다. 그럴려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낮추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늘 열려있는 자신을 유지하는 방법은..." 그래서 이처럼 이는 자신이 믿음의 주체가 된다는 위험을 가져옵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들이 우리의 노력으로 왔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노력으로 왔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진실로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말 해보면 압니다. 예를 들어 글을 쓴다는 것. 우리가 글을 씁니까? 글을 쓰는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데요? 자신이 글을 쓴다고 생각할 때에 그 대부분은 자신의 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한테서 옵니다. 그렇지 않은 글은 가십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라는 말도 가능합니다. 글을 제대로 쓴다는 것은 글을 나타냄입니다, 자신은 투명한 채로. 이를 설교자의 자세라고 해도 되겠나요? 메신저는 메세지를 전하러 온 것이지 메신저를 나타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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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9.29 08:14:08

뉴욕 님,
좋은 대글, 감사합니다.
"말씀은 하나님한테서 옵니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의 글이 단지 우리의 주관적인 생각의 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통치, 그 생명과 일치에서 오는 사건이어야겠지요.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음악의 원초적 경험이 있어야 작곡을 하듯이
그런 하나님 경험이 있어야 설교가 가능하겠지요.
사이비 작곡자의 작품을 우리가 분간하기 힘들듯이
사이비 설교자의 설교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요.
"자신은 투명한 대로" 이런 상태에 우리가 어떻게 돌입할 수 있을까요?

[레벨:4]New York

2006.09.29 11:25:38

"자신은 투명한 채로" staying transparent. 목사님,
제가 전 글에서 드린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죽음과 일 그리고 산모의 고통이라는 것을 받았는데에 왜 이제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아직도 목적인양 대한다는 모순을 짚은 것은 Kafka가 제시한 것이고 저는 그 질문을 대한 것이 미국의 대학시절 제 아파트였습니다. 그 모순을 대했을 떄에 목사님은 모르겠지만 저는 전 글에서 권현주씨의 표현처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답을 몇 년후에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제시하는 목사님은 물론 학자 비슷한 사람도 뵌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를 우리가 따먹었지만 그 선악과를 뛰어넘을수 있습니다. 저주라는 표현은 성경을 그대로 옮긴 것에서 그랬지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냥 저주를 했겠습니까?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맥락에서 바로 그것이 "자신은 투명한채로" 이런 상태에 돌입할 수 있는 "첫" 걸음입니다. 답이 있다는 것은 이미 벌써 반의 힌트를 접고 들어갑니다. 기름을 파는 정유회사가 어디를 파야되는 줄을 안다는 크나큰 기회를 의미합니다. 각 분야의 첨단을 걸어가는 학자들이나 인들한테는 가장 소중한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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