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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2일 새 포도주 (5)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 2:22)
포도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국교회의 술 문제를 한번 짚어야겠군요. 정통신앙에 묶인 분들은 일반적으로 술을 그리스도인이 금해야 할 중요한 목록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런 정통신앙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십니다. 꽉 막히지는 않았지만 온건한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교회의 덕과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서 술을 사양합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술을 성서와 신학에 근거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하려면 시간이 제법 많이 필요하니까, 여기서는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만 간단하게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술은 커피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단순히 기호식품에 불과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것처럼 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전통이 그걸 금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술로 인해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가정적인 문제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판단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이 술을 싫어하면 커피가 싫어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처럼 마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런 삶의 기호와 습관을 규정하는 차원으로 끌어내리면 결국 복음이 비추는 은총의 빛은 사라지고 대신 온갖 율법의 가치들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포도주 마시길 즐겨(?) 하셨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 놓고 술을 마셔도 좋다는 말이냐고요? 이 질문은 커피를 마음 놓고 마셔도 좋습니까와 다를 게 없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막 2:22)
포도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국교회의 술 문제를 한번 짚어야겠군요. 정통신앙에 묶인 분들은 일반적으로 술을 그리스도인이 금해야 할 중요한 목록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런 정통신앙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십니다. 꽉 막히지는 않았지만 온건한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바울처럼 교회의 덕과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서 술을 사양합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술을 성서와 신학에 근거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하려면 시간이 제법 많이 필요하니까, 여기서는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만 간단하게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술은 커피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단순히 기호식품에 불과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것처럼 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전통이 그걸 금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술로 인해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가정적인 문제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판단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이 술을 싫어하면 커피가 싫어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처럼 마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런 삶의 기호와 습관을 규정하는 차원으로 끌어내리면 결국 복음이 비추는 은총의 빛은 사라지고 대신 온갖 율법의 가치들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포도주 마시길 즐겨(?) 하셨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 놓고 술을 마셔도 좋다는 말이냐고요? 이 질문은 커피를 마음 놓고 마셔도 좋습니까와 다를 게 없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다.
우선 결론을 말씀드리면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더 힘듭니다. 전 덧 글 중 한 번 잠시 비춘 적이 있는 데 좀 더 자세히 나타내 보겠습니다. 자신이 글을 쓴다고 할 때에 정작 들여다보면 정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글을 읽는 데에 쓰여집니다. 그리고 정작 글은 “지금, 여기서” 찰라에 옵니다. 교통사고가 찰라에 나는 것처럼요; 첫 사랑이 찰라에 와서 박히는 것처럼요. 사고(accident)입니다. 어느 영문작가의 표현처럼 문장은 천장에서 떨어집니다. 곧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식을 둔 부모가 어떻게하면 우리 아이도 글을 잘 쓰냐고 물으면은 난감합니다: 부모가 질문 자체를 이해 못하기에 그렇지요. 질문을 이해 못하고 묻는 질문이 훨씬 더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답을 이해 못하고 답하는 답, 상황논리가 훨씬 더 비일비재합니다.
글을 읽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게 힘들기에 그나마 글을 잘 써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글을 읽는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자신의” 글을 읽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글이니 완전히 이해하여하는 데에 그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 쓰는 일조차 할 자세를 유지하기 힘듭니다. 물론 가십이나 글의 가치를 따져 볼 필요도 없는 글은 그냥 쭉 써서 갈길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고 아무리 힘들게 쓴 글이라도 아닌 글은 아닙니다.
How you write is what you write.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어느 정도의 예술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글 수준에 도달하면, 즉, 글을 통해 절대자내지는 절대적인 것(The Absolute)을 나타낼 수준에는 How you write is what you write: “어떻게” 쓰냐가 “무엇”을 쓰냐입니다(제 영어도 번역하기가 힘든데 더 좋은 번역이 가능하면 덧 글을 달아주세요). 그 무엇을 쓰냐는 하나님이 나타냅니다. 모든 “무엇”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쓰자고 정작 앉아서 쓰는 글은 글이 아닙니다. 글쓰는 자신은 투명한 채로, 글을 나타내는 것이, 오직 하나님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글쓰는 이가 투명한 유리가 될 수도 있고 거울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어서 투명한 유리가 될 수 없다면 거울은 될 수 있습니다. “거울이 좀 덜 먹고 더 반사하는 것을 잘 할 수만 있었다면”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증명이라는 쌍스러운 과정을 겪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글을 쓸 줄 아는 자가 어느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면, 글을 쓰는 것은 고문입니다. 정치적인 목적이든, 어느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든 그것은 글이 아닙니다. 그 무엇은 하나님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하나님뿐입니다. 글 쓰는 자가 나타내면 헛되고 헛된 것에 불과함은 물론 하나님이 정작 나타내고자하는 것 조차 가립니다. 여기에 Gorge Orwell이라는 작가가 모든 책은 실패작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근원이 있고,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Kafka가 자신의 글을 모두 불살라 버리라고 친구인 Max Brod에게 한 말이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Kafka는 뛰어나서 그 정도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그의 “질문들”을 대해보면 압니다.
여태까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