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5일- 바다 이야기

조회 수 3130 추천 수 48 2006.08.25 23:26:06
2006년 8월25일 바다 이야기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막 2:13)

본문의 바다는 물론 갈릴리 호수를 가리킵니다. 갈릴리 호수와 그 호수를 낀 몇몇 마을, 그리고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벳세다 광야 등등, 갈릴리 호수는 예수님 활동의 실질적인 중심무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그가 성장한 고향은 갈릴리 지역의 한 작은 동네 나사렛입니다. 복음서의 개괄적인 보도에 따르면 때가 되어 출가하신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일단 남쪽 예루살렘 근방으로 내려가신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예수님의 본격적인 활동이 갑자기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정확한 연대기에 따라서 보도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보도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예수님의 활동에서 갈릴리 호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겁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특히 갈릴리 호수를 초기 활동의 중심무대로 삼았다는 것은 그 지역이 활동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갈릴리 호수 부근은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의 영향력에서 그만큼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부터 유대지역과 예루살렘 중심으로 활동하셨다면 현재 우리가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역사적 결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졌을지 모릅니다.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혁명적인 기질이 강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에 의해서 지배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도인 예루살렘에 의해서도 적지 않은 불이익을 당한 지역이기 때문에 그런 기질이 쌓이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정부, 반로마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거의 갈릴리 출신이거나 갈릴리를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 빌라도 총독도 역시 예수님을 그런 혁명가로 생각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나사렛 예수 집단이 기본적으로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과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가 현실유지(status quo)를 허문다는 사실에서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합니다. 물론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그런 정치적인 성격을 완전히 배제했지만 빌라도가 그 당시 로마제국이 파송한 지방장관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빌라도의 사법적인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예수는 그 당시 명실상부하게 반역자에게 해당되는 십자가에 처형될만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여러 명의 제자들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모두 어부들이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 최소한 네 명이 어부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런 결과는 약간 의외처럼 보입니다. 목수는 뭍에서 일하고, 어부는 물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양자 모두 사회 상류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즉 이 세계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습니다.
바다와 호수는 인간의 영원한 고향인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입니다. 지구의 생명체가 바다에서 시작되었듯이 인간 개인도 역시 어머니의 자궁에서 시작됩니다. 갈릴리 호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희망이 잉태된 영적인 자궁과 같습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났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갈릴리 호수가 바로 예수님의 영적인 고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영적인 갈릴리 호수는 어디인가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갈릴리 호수 말입니다.

주님, 당신이 곧 우리 영혼의 호수이십니다. 아멘.

[레벨:7]

2006.08.26 00:14:48

"예수는 그 당시 명실상부하게 반역자에게 해당되는 십자가에 처형될만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정말 당시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는 반역죄를 저질렀나요?
아니면 유대 기득권 세력의 압력이 빌라도의 판결에 영향을 준 것인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8.26 00:22:43

길벗 님,
처음이죠?
반갑습니다.
예수님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고,
로마에 대항하라고 대중을 선동하지 않은 것도 분명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반역자에게만 해당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이런 명제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 사이에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보물찾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그리고 성서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것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그건 숨어 있어요.
사람들은 겉만 보려고 하지요.
성서의 행간을 읽지 않고,
그리스도교 교리의 숨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에 치우칩니다.
빌라도가 유대 종교 권력자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개연성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구요.
빌라도가 볼 때 예수는 로마 체제을 위협할만한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요?
이런 말을 하려면 길어집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겠네요.
한 마디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로마와 병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팍스 크리스티)와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는 함께 할 수 없어요.
왜 그럴까요?....

[레벨:7]

2006.08.26 06:44:21

목사님,
저는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찾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ㅠ.ㅠ
성서에서는 찾아야 될텐데..
당시 빌라도가 팍스 크리스티까지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 나라에까지 이해가 미쳤을까요?
그렇다면 빌라도는 대단한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군요.
빌라도의 통찰력이 그렇게까지 깊었을 줄은 몰랐는데..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8.27 00:06:35

팍스 크리스티는 현대용어이기 때문에
빌라도가 그걸 예측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단초를 느낄 수는 있는 거에요.
예수를 만난 빌라도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건 끝나지 않을 대화의 주제입니다.
빌라도와 예수.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앞으로도 소설이 쓰여질 겁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어떤 위기와 두려움을 느꼈을까요?
그런 것도 없이
다만 유대인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한 걸까요?
인도의 신비사상가의 말에 따르면
예수는 혁명을 넘어, 반역을 살았다고 하네요.
부드럽지만 현체제에 반역하는 인물은
결국 스스로 존재의 근거가 있다고 보는 로마제국에게 위험인물이지요.
지금 이런 말을 결정적인 주장으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러나 허무맹랑한 주장도 아닙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그와 일치한 역사의 신비.
도대체 예수는 왜 로마법에 의해서 처형당했을까요?
인류의 사법역사에서 일어난 최대의 오판이었을까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자기를 절대화하는 모든 세력을 해체시키는 힘입니다.
빌라도는 최소한 그걸 눈여겨 보았을 것이며,
그걸 근거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을 겁니다.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9월13일 의인 (1) [1]

  • 2006-09-13
  • 조회 수 2910

2006년 9월13일 의인 (1)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6) 왜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느냐는 서기관의 불만을 듣고 주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듯이 의인에게는 예수가 필요 없다는 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의인(義人)은 구약성서의 중심 사상입...

9월11일- 바리새인 (6)

  • 2006-09-11
  • 조회 수 2586

2006년 9월11일 바리새인 (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바리새인 서기관에게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그의 진보성입니다. 바리새인이 과연 진보적인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사두개인들처럼 로마의 체제 안에 안주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진보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진보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과 대립...

9월10일- 바리새인 (5)

  • 2006-09-10
  • 조회 수 2727

2006년 9월10일 바리새인 (5)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지식인이 신비를 못 본다는 어제의 말은 그렇게 기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지식인들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외피에 눈을 가린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자기의 업적이 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통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아주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이는 흡사 티브이를 크게 틀어놓는 집에서는 사는 사람들은 가을바람소리, 귀뚜...

9월9일- 바리새인 (4)

  • 2006-09-09
  • 조회 수 2619

2006년 9월9일 바리새인 (4)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저는 어제 지식인의 한 전형인 바리새인 서기관의 문제가 진리보다는 정보에 치우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밥을 먹는 그 행위 안에 담긴 생명보다는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율법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지식인의 한계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지식에 사로잡...

9월8일- 바리새인 (3) [1]

  • 2006-09-09
  • 조회 수 2666

2006년 9월8일 바리새인 (3)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서기관은 대표적인 지식인입니다. 서기관은 유대교 율법을 연구하고, 수많은 불문율법을 해석하거나 구약성서의 사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이 사람은 보수적인 사두개파가 아니라 진보적인 바리새파라고 합니다. 진보 지식인! 멋있는 말이군요. 그가 바로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식인은 지적인 능력이 뛰...

9월7일- 바리새인 (2)

  • 2006-09-07
  • 조회 수 2987

2006년 9월7일 바리새인 (2)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우리는 어제 ‘바리새인’에 관한 요아킴 그닐카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설명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상당히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서로 다른 신학적 경향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은 산헤드린에서 심문을 받을 때 부활 신앙으로 ...

9월6일- 바리새인 (1)

  • 2006-09-06
  • 조회 수 3009

2006년 9월6일 바리새인 (1)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아래의 글은 요아킴 그닐카의 <마가복음 주석>(국제성서주석 39,1)에서 각주를 빼고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문적인 신약학자의 눈을 통해서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시기의 정황을 조금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바리사이파는 예수의 시대에 (사두가이파와 에쎄네파와 함께)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종교적인 당파를 이루었다. 이 운동의 발단...

9월5일- 세리와 죄인들 (3)

  • 2006-09-05
  • 조회 수 3010

2006년 9월5일 세리와 죄인들 (3)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요즘 설교비평을 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이 여러모로 괜찮은 목사들의 설교에서 복음과 신앙의 본질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복적이지도 않고 감정에 치우지지도 않은, 매우 건전한 신앙을 설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모든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드러내기보다는 단지 모범적인 신앙만을 해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월4일 세리와 죄인들 (2) [4]

  • 2006-09-04
  • 조회 수 3212

2006년 9월4일 세리와 죄인들 (2)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예수님 주변에 세리와 죄인들이 늘 함께 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그들을 모범생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늘 우리는 복음과 설교의 근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마음을 열라는 초청이지 그들을 쓸 만한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훈계가 아닙니다. 초청과 훈계는 근본적으로 다...

9월2일- 세리와 죄인들 (1) [4]

  • 2006-09-02
  • 조회 수 4109

2006년 9월2일 세리와 죄인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본문에 세리와 죄인이 병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세리와 죄인이 별 다를 게 없다는 뜻이겠지요. 신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본문에 나오는 세리들은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조세는 로마 황제의 국고로 들어가지만 관세는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로데 안...

9월1일- 잡수시는 예수

  • 2006-09-01
  • 조회 수 2588

2006년 9월1일 잡수시는 예수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리 레위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예수님이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당시는 오늘과 달리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불어서 무엇을 먹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뒤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보면 먹는 문제는 나사렛 예수 ...

8월31일- 세관에 앉은 사람 (5) [5]

  • 2006-08-31
  • 조회 수 3028

2006년 8월31일 세관에 앉은 사람 (5)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아내와 나는 어젯밤 시몬의 집에서 돌아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거나, 회개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말입니다. 아내도 그렇지만 나도 그런 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물론 어렴풋이는 알겠는데,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의 그 말은 마치 과녁 중심에 꽂힌 화살처럼 내 ...

8월30일- 세관에 앉은 사람 (4)

  • 2006-08-30
  • 조회 수 2761

2006년 8월30일 세관에 앉은 사람 (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마침내 나는 어제 밤에 예수라는 사람을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나를 찾아왔던 친구가 헤어지면서 알려준 그 집에서 말입니다. 그 집은 예전에 한번 가보았던 곳입니다. 시몬이라는 어부의 집이죠. 나는 어렸을 때 내 친구와 함께 시몬의 집에 놀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시몬이 사촌 간이었거든요. 시몬과는 그 뒤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친구...

8월29일- 세관에 앉은 사람 (3)

  • 2006-08-29
  • 조회 수 2434

2006년 8월29일 세관에 앉은 사람 (3)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나는 어젯밤 선잠을 잤습니다. 아무래도 그 낯선 사람 생각이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가 누군지, 그가 한 말과 그가 한 일은 정말 옳은 건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네요. 내 영혼의 심층을 뚫어보는 것 같았으니까요. 밤새도록 뒤척이는 나를 보고 아내가 잠결에 왜 그러냐고 묻더군요. 변소에 간다고 한 마디 하고 ...

8월28일- 세관에 앉은 사람 (2)

  • 2006-08-28
  • 조회 수 3061

2006년 8월28일 세관에 앉은 사람 (2)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내 자리에 앉아서 내가 맡은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관에서 내가 맡은 일은 유대인들에게서 징수한 세금을 상부에 납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서 로마 공무원 시험을 보고 벌써 5년 동안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마음이 복잡합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점점 힘들어지고, ...

8월27일- 세관에 앉은 사람 (1)

  • 2006-08-27
  • 조회 수 3271

2006년 8월27일 세관에 앉은 사람 (1)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모든 제자들은 아니고 다섯 명이 그 대상입니다. 베드로 형제, 야고보 형제, 그리고 레위입니다. 앞의 네 사람은 어부였고,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 레위는 알패오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의 목록인 마가복음 3:18절에 따르면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입니다. 어느 구절이 옳...

8월26일- 가르침 [2]

  • 2006-08-26
  • 조회 수 2953

2006년 8월26일 가르침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막 2:13) 예수님은 바닷가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에게 ‘랍비’라는 호칭을 얻었듯이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교육학자들은 healing, teaching, preaching을 예수님의 삼대업무였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가르침과 설교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구분은 가능합니다. 설교는 선포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가르침은 설득의 성격이 강합니다. 선포는 계...

8월25일- 바다 이야기 [4]

  • 2006-08-25
  • 조회 수 3130

2006년 8월25일 바다 이야기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막 2:13) 본문의 바다는 물론 갈릴리 호수를 가리킵니다. 갈릴리 호수와 그 호수를 낀 몇몇 마을, 그리고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벳세다 광야 등등, 갈릴리 호수는 예수님 활동의 실질적인 중심무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그가 성장한 고향은 갈릴리 지역의 한 작은 동네 나사렛입니다. 복음서의 개괄적인 보도에 따르면 때가 되어 출가하신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

8월24일- 놀라움 (6)

  • 2006-08-24
  • 조회 수 3106

2006년 8월24일 놀라움 (6)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 2:12)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와 놀라움을 모르거나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현상은 우리에게 두 가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냉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냉담한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교회생활에 게으를 뿐만 아니라 그리...

8월23일- 놀라움 (5) [1]

  • 2006-08-23
  • 조회 수 2395

2006년 8월23일 놀라움 (5)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 2:12) 우리가 놀라움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앞에 놓인 이 세계가 너무 익숙하게 여겨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뜬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해서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이 있고, 직업이 있고, 친구들도 있습니다. 하늘과 산, 새와 나비는 늘 그렇게 있어왔던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은 그...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