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81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9절에서는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더니 이제 10절에서는 이십사 장로들이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드렸다고 합니다. 네 생물이나 이십사 장로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을 보좌하는 신적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천상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땅에서 당연히 경배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보좌에 앉으신 이에 대한 묘사가 9절과 10절이 똑같이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for ever and ever)로 되어 있습니다. 8절에 나오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이 영원성 개념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영원성을 낱말로는 이해해도 실질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얻습니다.”라는 사도신경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영생도 영원성 개념과 직결됩니다. 도대체 영원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앞에서도 이 개념을 설명하다가 존재의 신비까지만 말하고 끝냈습니다. 여기서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영생’을 제가 어떻게 생각하고 믿는지만 신앙 고백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존재이시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게 곧 영생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은 내가 어떤 상태에 떨어지든지 불문하고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저에게 믿음 자체이기도 하고 희망 자체이기도 하고 사랑 자체이기도 합니다. 아직 결정되지 않는 미래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 미래의 생명은 제가 설계하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실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이미 여기 내 삶에 들어와 있습니다. 평화의 영으로, 기쁨의 영으로, 해방의 영으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기쁨과 해방을 경험했으니까 저는 이미 영생을 약속받은 사람이자 영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완전한 평화이고 얼마나 확실한 기쁨이며 얼마나 철저한 해방인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