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52)

조회 수 770 추천 수 0 2019.11.09 19:41:17

은혜

 

은혜는 헬라어 카리스의 번역이다. 카리스는 grace, kindness, mercy, gift, blessing 등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다. 카리스와 비슷한 단어는 카리스마. 카리스마의 뜻은 (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gift이다. 카리스마는 보통 은사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은혜와 어원이 같다. 카리스나 카리스마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면 된다. 은혜에 굳게 서려면 우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연의 차원에서 보면 그게 쉽게 눈에 들어온다. 빛과 바람과 구름과 땅은 우리가 만들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텃밭을 가꿔본 이들은 흙의 생산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 것이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사람이 먹고사는데 필요한 땅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산 경험에 근거해서 주장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1백 평이면 충분하지 않을는지.

이런 말이 공자 왈()로 들리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배웠고 경험한 삶이 소유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분석했다. 소유 지향적인 삶은 소유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태도다. 여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21세기 대한민국은 소유 지향성이 극에 달했다. 일단 그런 삶은 우리를 쾌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참된 만족이 어렵다는 게 문제다.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오늘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피로 사회다. 교회도 역시 피로 공동체는 아닐는지. 만약 참된 만족을 원하지 않는다면 계속 소유에 매달려서 살아도 된다. 존재 지향적 삶은 존재에서 삶을 확인하는 태도다. 이게 무조건 무소유를 말하지 않는다. 소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더 궁극적인 차원인 존재(to be)를 붙드는 삶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여기 2천만 원짜리 승용차를 타는 사람이 있고, 1억 원짜리 벤츠 수입차를 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벤츠는 승차감도 좋고, 다른 데 가서도 벤츠 운전자는 대우받는다. 서민용 차와 고급 차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차를 운전한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가 소유 지향성이고, 후자가 존재 지향성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삶을 구성하는 모든 조건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 자기 소유는 없다. 초기 기독교에서 잠시 실시되었던 공동체 정신이 여기에 자리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다. 우리가 출가 수도자라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만 철저하게 자본주의에 길든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론에도 해당한다. 우리나라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개교회주의다. 이를 더 부정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사유화다. 이런 제도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아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여기서 교회론에 해당하는 단어는 거룩한 공교회이다. 공교회(catholic church)는 교회의 보편성을 가리킨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이다.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구별된 공동체다.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개별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라 노회와 총회가 교회라는 뜻이다. 기독교는 4세기에 열린 두 번의 중요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치면서 교구 중심의 교회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개신교가 다시 교구 중심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교회의 보편성과 단일성 개념은 회복해야 한다. 이런 개념이 말하는 핵심은 교회의 사유화를 향한 저항이다.

은혜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 사건이다. 신학 용어로는 케리그마라 하기도 하고, 기독론이라고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고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이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다. 알아도 그걸 실제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에 관해서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벧전 2:24절을 읽는 것으로 대신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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