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16
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우리말 어순과 그리스어 성경의 어순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은 ‘기뻐하라.’라는 단어가 이 문장의 첫머리에 나옵니다. 영어 성경도 Rejoice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우리말은 한참 뒤에 즐거워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런 어순이 재미있습니다. 그쪽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처음부터 즉각적으로 드러내는데 우리는 뜸을 들이는 방식입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즐거워합니다. 하늘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성도들은 순교 당해서 하늘나라에 먼저 간 사람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 일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총망라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로마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장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울며 애통하면서 ‘화 있도다.’ 하고 외치는 걸 우리가 실제로 기뻐할 수는 없고 오히려 불쌍하게 여겨야겠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의하게 살았다고 해서 인생이 망하는 걸 우리가 어떻게 기뻐하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염라대왕처럼 묘사하는 겁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제대로 바치지 않았거나 새벽기도회에 빠졌다고 해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은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성경의 근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징벌로 보면 곤란하다는 관점이 그것입니다. 욥기는 이 문제를 핵심 주제로 다룹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인 욥의 인생이 파멸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잘못을 회개하라고 욥을 다그칩니다. 그의 파멸을 보니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잘못을 범한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물론 선의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욥은 친구들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그렇습니다. 옳은 사람도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어쭙잖은 말로 그들을 위로하거나 훈계하지 말고 함께 슬퍼해 주거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도 못 하겠다면 아예 침묵을 지키는 게 낫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어떻게 실현하실는지 그 방법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축복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명예도 더 많아지고, 더 건강하게 사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는 모든 게 잘 풀리니까 더 교만해질 수도 있고, 더 자기중심적이 되고,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 됩니다. 결국에는 삶의 무의미성과 허무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실현되는 게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