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18
18: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요한은 하늘로부터 음성을 계속 듣습니다. 이제는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과 노래하는 이들 등등, 예술인들의 활동이 멈춘다는 음성입니다. 귀금속을 만드는 장인이라 할 세공업자들도 사라집니다. 맷돌은 곡식을 빻는 데 필요한 기구입니다. 맷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먹고살기가 아주 힘들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의 풍요로운 문명이 끝장나는 겁니다. 실제로는 당시 로마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요한의 이런 묵시적 상상력은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역 광장에서 ‘기차를 탈 사람도 없고, 예술의 전당은 문을 닫을 것이며, 모든 카페와 빵집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외친다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지 않겠습니까.
파국적 종말이 온다는 요한의 묵시는 궁극적으로 옳습니다. 지구와 그 안의 만물이 붕괴하니까 인간 문명도 결국은 해체됩니다. 문제는 시점이 언제냐, 하는 것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묵시적 파국이 올 테니까 일상을 허투루 살아도 좋다거나 허무주의에 떨어져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묵시적이고 종말론적 관점을 놓치지 않아야만 이 현실과 일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인의 삶도 똑같지 않습니까. 죽음이 이미 지금 여기에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일상을 생명 충만하게 삽니다. 우리가 곧 헤어진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랑합니다. 모든 이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대합니다. 더는 섭섭할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언젠가 늙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걷지도 못할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은 지금 중심을 잡고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둔 사람이라면 죽음까지도 부활 생명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겠으나, 그렇기 때문이라도 인간 문명의 파멸이라는 요한의 묵시적 상상력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시적이고 종말론적 관점을 놓치지 않는, 죽음이 이미 여기에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만이 일상을 제대로 살아내며, 일상을 생명 충만하게 삽니다."
점점 공부할수록 현실과 비현실이 뒤집혀집니다.
점점 공부할수록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나아갑니다.
점점 공부할수록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갑니다.
점점 공부할수록 마음먹은 대로 되던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점점 공부할수록 사람들로 부터 인정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궁극적인 대상으로 부터 인정받으면 그외의 대상으로부터는 인정 받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참 모자라지만, 이렇게 사유하면서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한편으로는 위선과 거짓만 늘어나는 것 같지만
종말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린자의 자리, 낮은 자리, 하나님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서 살아 보려고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