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행(5)

조회 수 1206 추천 수 0 2019.01.26 18:48:44

마당

점심 먹고 유유자적의 템포로 목포에서 다시 망운면의 김정관 백은선 집사 집으로 돌아왔다. 골목 마지막 집이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 왼편에 붙어 있는 집에는 삽살개가 여럿이다. 우리가 드나들 때 이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댔다. 망운 농협 마트에 잠시 들렸다. 여 교우들 말이 돌아갈 때 운전기사가 졸지 않게 하려면 주점불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간단히 간식거리를 사들고 집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며 백 집사가 끓여주는 따끈한 모과차를 마시고, 또 마트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한 개씩 먹으면서 담소를 잠시 나누었다. 마당에는 별의 별것이 다 있었다. 생선을 말리는 망이며, 태양광 조경 전등, 고구마 굽는 방, 앞으로 설치할 중고 화목보일러, 석조로 된 항아리 몇 개 등등이다. 뒤편으로는 넓은 밭이 있고, 오른 편에는 빈집이 있다.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빈집이 자주 눈에 뜨인다. 주인 집사 부부는 떠나는 우리에게 대형 유리병에 담긴 20년 된 더덕주와 모과청, 고구마와 곶감, 어제 먹었던 튀김 등등, 바리바리 싸주었다. 마지막 순간은 짧았지만 길었다. 적당하게 기울어진 햇살, 마당의 소나무와 잡풀 하나 없는 흙 마당, 간혹 지나가는 훈련용 비행기 소리, 하늘의 엷은 구름 ...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심방 일행 다섯 명은 카니발에 올라타고 마당을 빠져나왔다. 떠나는 사람들이야 길을 가기에 바빠서 모르겠으나 자신들 집에 남은 부부는 한동안 적적할 것이다. 스마트 폰 사진첩에 들어있는 사진을 보면서 그 달콤한 적적함을 달랠지도 모른다. 무안군 망운면 목동112-10 마당에서 보낸 짧았던 순간마저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이들의 기억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현실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기억도 소실점처럼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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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낙조를 보고 돌아와서 보니 달이 마당까지 따라왔다. 날이 따뜻해지면 마당이 어떻게 변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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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란을 낳는 청계다. 그날 낳은 알 3개를 얻어와서 다음날 아침에 먹었다. 바닥에는 한약재가 깔려 있어서 닭 특유의 냄새도 전혀 없다. 수탉 한 마리와 암탉 세 마리가 재밌게 산다. 왼편 위 소쿠리에 들어앉은 닭은 지금 알을 낳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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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 본채와 오른편 진돗개 집 사이의 텃밭이다. 원래는 다른 용도였는데, 백 집사의 요청으로 텃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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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이 있는 평상이다. 본채 왼편이다. 겨울만 아니라면 저 평상에서 밥을 먹었어도 좋을 텐데, 아쉽다. 평상 뒤로 또 한 마리의 개집이 보인다. 이 집에 개가 4마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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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 트렁크에 가득하다. 각 가정마다 고구마 한 상자에다가 이것저것이 주어졌다. 가운데 키 큰 유리병에는 20년 된 더덕주가 들어 있다. 나에게 주는 특별선물이다. 이번 일행은 술에 약했다. 이번 한 주간을 저 고구마로 아침을 대신했다. 앞으로도 당분간 무안 황토에서 자란 고구마를 열심히 먹어야겠다.

 

700킬로미터

이제 졸음과 씨름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한다. 이미 목포까지 돌아왔고, 전날 잠이 부족했으니 기사의 긴장이 풀어지면 모두 고생이다. 교회에서 무안을 거쳐 목포까지 왕복으로 계산하여 640킬로미터인데다가, 원당의 우리 집까지 계산하면 730킬로미터가 나온다. 아무 사고도 없었고, 실수도 없었고, 졸지도 않고 잘 왔다. 오는 길에 지리산 휴게소에 다시 들려서 커피를 마셨다. 무안 갈 때의 휴게소 맞은편이다. 카페 주인이 진하게 할까요, 약하게 할까요, 하고 묻기에 진하게 한 잔 달라고 했다. 정 장로는 커피 마시면 수면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커피 라떼를 시켰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정 장로는 돌아오는 길에 고령 부근에서 잠시 졸았다. 나는 조수가 조는지를 확인하느라 졸음이 올 겨를이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본 가장 멋진 풍경은 거창을 지날 때부터 나타났다. 대광고속도로(옛날에는 88고속도로라고 불렀다.)는 거창 다음부터 터널이 이어진다. 높은 산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형 탓이다. 터널 많은 지역을 빠져나오자 날이 어두워졌다. 검은 산 사이에서 붉고 둥근 달이 하고 나타났다. 이건 완전히 우주에 나갔을 때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가. 음력 16일이니 달이 크다. 차가 낮은 지역으로 내려가면 달이 숨었다가 올라오면 다시 나타났다. 산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는 달을 보노라니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령을 지나자 도시 불빛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령 IC 가로등 숫자도 많아졌다. 좌우로는 깜깜한 산과 숲이 비밀스럽게 버티고, 중간에 작은 가로등이 은은한 빛을 뿌리고 멀리는 도시 불빛이 반짝이고, 그 위로 큰 달이 공중 부양하듯이 떠있었다. 모두 이심전심으로 매혹적인 분위기에 빠져서 차 안에 종종 정적이 흘렀다.

이번 심방에 참여한 분들과 함께 보낸 12, 삼시세끼를 시간으로 따지면 30시간 가까이 된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렸고, 휴게소에 들렸고, 100년 넘은 고가에 머물면서 먹고 마셨으며, 황토밭과 겨울채소를 보고, 섬과 갯벌과 모래와 해풍과 낙조를 함께 경험했으며, 꼬불꼬불한 해안로 드라이브를 만끽했고, 예향 도시 목포의 유달산을 비롯하여 골목길과 항구의 다이내믹한 풍경을 함께 나누었다. 더구나 재미있고 유익한 대화가 적당한 속도로 이어졌던 것도 인상 깊다. 각자에게는 여기서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교감과 공감과 공명이 더 많았을 것이다. 사람이 친해지려면 이런 여행을 함께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동행한 정 장로 내외, 홍 집사, 그리고 우리를 환대해주신 무안의 김 집사 내외, 모두 감사드린다. 덕분에 2019년 겨울여행이 편안하고 즐거웠고 의미 깊었다. 그나저나 무안 갯벌에서 낙지를 잡아보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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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캔디

2019.01.26 23:57:55

다섯번에 걸쳐서 올려주신 겨울여행기 재미나고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풍경도 너무멋지고 아름답구요.


저도 1박2일 삼시세끼를 목사님일행과 동행한것같은 느낌입니다..ㅎㅎ


700킬로가 넘는 거리를 안전운전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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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9.01.27 21:34:29

이틀에 걸쳐서 700킬로를 운전하는 일이

앞으로 저에게 또 일어날까요? ㅎㅎ

겨울여행 기분이 조금이나마 전달된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레벨:13]쿠키

2019.01.27 04:14:07

'100년을 살아보니' 저자 김형석 교수님은 인생기 황금기가 60~75세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목사님의 글과 삶을 대하니 정말 인생의 황금기 맞습니다.^^
사실 위에 댓글 다신 분과 무안 심방계획을 듣고 서울에서 내려가 합류해 볼까 머리를 굴리다가 대구샘터만의 오붓한 우정에 폐를 끼칠까봐 포기했는데 너무 배려심 많은 저희를 계속 약올리시는 듯한 심방기 아니 여행기를 읽으니 배가 아프네요. ㅎㅎ
마치 대사 없는 잔잔하고 여유로운 영화 한편을 본 느낌입니다. 글이 그림처럼 펄쳐지니 대사가 필요없는 영화처럼, 자주 필름이 멈춰선 장면 장면에 빨려들어가면서...
일상의 많은 순간 순간에서 귀한 보석들을 감지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여하튼 죽기 전에 베스트 드라이버의 카니발을 꼭 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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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9.01.27 21:36:48

김형석 교수님이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제 인생의 황금기가 앞으로 제법 남은 걸로 알겠습니다.

2월11일에 서울에서 뵙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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