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44
20: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당시 사람들은 천년을 세계 역사가 변하는 한 단위로 생각했습니다. 벧후 3: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시 90:4절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천년을 날수로 계산하면 365,000일입니다. 하루와 천년은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로 다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후서와 시편 기자가 저렇게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성 앞에서는 모든 유한한 숫자가 아무리 커도 작은 숫자와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까요.
시간은 무엇일까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시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간은 되돌릴 수도 없고 밀어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물체의 속도에 따라서 시간이 다르게 흐릅니다. 그 차이가 너무 미미해서 우리의 일상에서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주의 차원에서는 시간의 속도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우주선을 타고 빛의 속도로 우주를 여행하는 동안 지구는 몇백 년이 흘러갑니다. 논리적으로는 시간 여행까지 가능하다고 합니다.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듯이 우리가 500년 전 시대로 돌아가는 거지요. 돌아가서 그 시대를 그냥 구경하는 게 아니라 자기 조상의 일에 관여하다 보면 자기 출생 자체를 부정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이론일 뿐이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열역학 2 법칙인 불가역성이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도 해당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시간은 여전히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종말이 와야만 시간의 비밀이 밝혀지겠지요.
시간의 상대성과 그 비밀 가운데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물리학자들은 받아들일까요? 여기에는 정말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 무슨 뜻인가만 간단히 짚겠습니다. 생명이 무한정(endless)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무한한 생명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가깝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원성은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면 이미 지금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는 예수님 말씀이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물론 여기서도 하나님 품에 안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더 생각해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