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156)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유대 당국자와 군중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는 조건들에 집착했다. 요한복음 기자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예수는 당시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제사장의 아들도 아니고, 왕족도 아니었다. 넓은 의미에서 다윗의 후손이기는 했으나, 그런 조건만으로 예수가 주류에 포함될 수는 없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조건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그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 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예수와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삶의 방향에서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해도 된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는 곧 생명을 안다는, 또는 생명 지향적으로 살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기에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생명을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실제의 삶에서 충만하게 느끼는 삶이 바로 생명을 아는 삶이다.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관점이 필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관점만 말하겠다. C.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자신의 뒤뜰에서 낯선 기분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달에 가서도 그런 기분을 절대 느낄 수 없다.”(더글라스 길버트, 클라이드 컬비 엮음, 씨 에스 루이스: 그의 삶 그의 세계, 90쪽에서 재인용).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순간안에서 살아있음의 신비를 충만하게 느낄 줄 알 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느낌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낄 것이며, 거기서 참된 기쁨에 참여할 것이다. 이런 삶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나도 잘 안 된다. 완전히 그쪽으로 방향 선회를 해야만 가능하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메타노이아, 즉 회심이라고 말한다.


[레벨:18]은나라

2019.07.17 06:32:23

6월말 설교에서..
'고통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어요.

''함께 한다''는 의미가 우리인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같이 있는다.'머 그런 뜻하고는 좀 다른 차원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거죠.

그런데 오늘 아침..
이 묵상을 보고 어렴풋이 알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거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건..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메타노이아, 회심이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안다.(삶의 방향에서)
생명을 안다.(생명 지향적으로 살겠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 ]
라는 뜻이라는걸 알게 되네요.

중요한건 순간속에서 영원(낯섬, 생명의 신비)를 충분히 느낄수 있어야..
내 모든 삶(고통중에 있더라도..)에서 생명(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충만하게 살수 있다는 건데요.
이건 좀 어려운거 같아요.
주님의 도움이 강력히 필요한..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07.17 23:06:11

은나라 님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노력과 조짐이 보입니다. ㅎㅎ

하나님은 '고통 중에 함께 하신다.' 보다는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신다.'가 더 정확하겠지요.

여기 평생 편두통을 앓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당해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알기 힘든 건 분명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친구와 악수를 통해서 전달받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의 친구로 사는 게 기독교인의 책무이겠지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천사의 역할을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어쩌다가 편두통이 사라지는 순간도 있고,

짧은 시간이나마 숙면하는 순간도 주어집니다.

그걸 붙들고 사는 삶도 우리가 멋진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보다

크게 못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삶의 저 나락과 바닥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 어떤 삶도 죽음은 아니니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생명의 기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우리 주 예수가 우리를 지탱해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 어떤 상황에 떨어질지라도

기쁨과 자유의 삶을 예민한 영성으로 찾아서 누려야 합니다.

[레벨:18]은나라

2019.07.18 07:27:59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노력과 조짐이 보인다고 하시니..
한줄기 빛이 느껴지네요.ㅎ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니..
기쁨과 자유의 삶을 저도 충분히 누릴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보입니다.
죄에서 이미 해방되었음을 늘 기억하면서..
예민한 영성으로 이 삶을 찾아 누려야 겠어요.
아주 아주 많이 감사드려요.^^

[레벨:18]부스러기은혜

2019.07.17 09:50:34

살아있음의 신비, 존재의 신비란
어쩜 가난으로 통칭되는 결핍, 고통, 절망,소외,고독, 허무가운데서 더 생생히 실감할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본질은 비유를 통해서만 드러낼수 있다고 하지요?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적확히 비유하는 가시적인 실체가 '가난, 가난한 자'일진데,

우린 믿음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그 가난에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겠죠?
이 이율배반의 역설과 자기모순속에서 경건의 모양만큼은 나날이 강고해져 가고 있으니

우리 신앙여정에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기란 연목구어겠구나... 싶습니다.


'까르페 디엠'이 주는 메세지처럼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언제나 오늘일뿐일진데

오늘 여기서 존재의 신비, 생명의 신비에 대한 거룩한 낯섬의 인식없이 J를 좇는다면

우리에게 구원이란 한낱 성경속의 추상명사요,

평생 무지개를 좇으려다 백발이 된 어느 소년 이야기를 써가는 것이겠지요?


고승의 반열에 올랐다 할수있는(ㅎㅎ) 목사님조차도 완전한 회심에 이르지 못했다 하시니,

우리야 평생 시늉만 내다 마는 땡중 신세로 지내다가 소천하게 되는건 아닐런지요?

방향성을 잃은지도 모른채 내고 있는 이 열심들이 모두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겠구나.....

되풀이 되는 탄식과 자책속에서 한 발자욱도 못나간채 늘 제 자리를 맴돌고 있기만 하는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07.17 23:16:18

저야말로 땡중입니다.

그런데도 매 순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연유일까요?

책읽기가 재미있고, 강독이 재미있고, 성경공부와 설교가 재미있고,

사람과 업적은 점점 축소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크게 느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부스러기 님의 고민을 목회자로서 저도 안고 있습니다.

교우들을 기독교 영성의 중심으로 안내해야 하는데,

이게 사람의 뜻대로만은 절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ㅎㅎ

성령이 알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시겠지 하고 마음 먹었습니다.

언젠가 모두가 자기의 얼굴을 확인하게 될 때에는 아쉬움이 있겠으나

하나님의 자비로 모두 치유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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