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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1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본에는 생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루터는 1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군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사본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이 아주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들쑥날쑥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현재 발견된 수천 개에 이르는 사본 중에서 동일한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 두 가지 점만 확인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성서의 축자영감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약간 씩 차이가 나는 사본 중에서 어떤 것을 원본이라고 해야 할는지 결정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현재 우리에게 원본이 없기 때문에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신앙이라기보다 광신, 또는 자기 고집에 불과합니다. 둘째, 다양한 사본을 비교 연구한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구약성서가 거의 원본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성서는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에 버금가는 문서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질문해봅시다. 왜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이 빠졌을까요?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책 한권을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더 핵심적으로는 구약성서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따라가야 할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의 편집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알아봐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맡겨놓고,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대답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은 마가복음에서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반적으로만 본다면 이 용어가 마가복음의 성격을 규정하겠지만, 그게 없다고 해서 마가복음의 근본이 훼손되는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꾸며주는 관용어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술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불필요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필요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의 필사자는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분별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상수와 변수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전면으로 나서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교회조직과 그것을 위한 행정, 심방 및 각종 회의, 사회봉사와 복지활동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아무리 조직을 위해서 가치 있는 것이거나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교회의 삶에서 종속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목사들은 얼마가지 않아 목회 활동으로 지쳐버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본에는 생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루터는 1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군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사본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이 아주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들쑥날쑥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현재 발견된 수천 개에 이르는 사본 중에서 동일한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런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 두 가지 점만 확인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성서의 축자영감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약간 씩 차이가 나는 사본 중에서 어떤 것을 원본이라고 해야 할는지 결정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현재 우리에게 원본이 없기 때문에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신앙이라기보다 광신, 또는 자기 고집에 불과합니다. 둘째, 다양한 사본을 비교 연구한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구약성서가 거의 원본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성서는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에 버금가는 문서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질문해봅시다. 왜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이 빠졌을까요?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책 한권을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더 핵심적으로는 구약성서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따라가야 할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의 편집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알아봐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맡겨놓고,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대답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은 마가복음에서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반적으로만 본다면 이 용어가 마가복음의 성격을 규정하겠지만, 그게 없다고 해서 마가복음의 근본이 훼손되는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꾸며주는 관용어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술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불필요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필요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의 필사자는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분별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상수와 변수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필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전면으로 나서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교회조직과 그것을 위한 행정, 심방 및 각종 회의, 사회봉사와 복지활동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아무리 조직을 위해서 가치 있는 것이거나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교회의 삶에서 종속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목사들은 얼마가지 않아 목회 활동으로 지쳐버릴지 모릅니다.
이길용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사본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것은.. 오히려 마가 공동체에서 그 표현에 대한 심대함 내지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그 관용어의 유의미한 사용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여하튼 이 부분 정말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첫번째 절에서부터 읽은 이들을 큰 고민에 빠지게 하니까요.
무엇이 저 수식어를 쓰게도 하고, 빼게도 했는가. 어찌보면 이 코드가 마가복음서를 읽는 중심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하나 어떤 시기의 사본에 저 단어가 나타나는가를 살피는 일도 그 코드를 읽는 좋은 방법이 될 것도 같습니다.
여하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됨으로써 삼위일체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도 되니까요.
(잠시 피씨방에 들어와서 메일 확인하다가 댓글달아봅니다)
무엇이 저 수식어를 쓰게도 하고, 빼게도 했는가. 어찌보면 이 코드가 마가복음서를 읽는 중심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하나 어떤 시기의 사본에 저 단어가 나타나는가를 살피는 일도 그 코드를 읽는 좋은 방법이 될 것도 같습니다.
여하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됨으로써 삼위일체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도 되니까요.
(잠시 피씨방에 들어와서 메일 확인하다가 댓글달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