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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2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출가한 후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러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소위 공생애가 핵심입니다. 그 기간은 짧게 잡으면 1년여, 길게 잡으면 2년여가 됩니다. 다른 종교창시자나 성인들과 비교할 때 전체 삶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 기간도 지나치게 짧았습니다. 3년짜리 신대원 공부보다 짧은 기간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좀 더 오래 사셨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그리고 유럽의 역사는, 전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부처님처럼 천수를 다하셨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연한 상상이었습니다. 어쨌든지 엄청나게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성구사전에서 “복음”(에방겔리온)과 그것의 동사형인 “복음을 전하다”(에방겔리조)라는 항목을 찾아보니까, 마태복음에 두 번, 마가복음에 여섯 번, 누가복음에 네 번 사용되었네요. 공관복음서 중에서 길이가 가장 짧은 마가복음이 이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고, 가장 긴 마태복음이 가장 적게 사용했습니다.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웬일인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고스, 또는 빛과 어두움 같은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요한복음서 기자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단어를 촌스럽게 생각한 걸까요? 바울의 편지에는 이 단어가 수도 없이 자주 나옵니다. 어쨌든지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1:1, 14,15, 8:35, 10:29, 13:10)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짜고짜로 <복음>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가는 무슨 이유로 자신이 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책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했을까요?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다른 종교를 택하든지 아니면 종교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한 인생이니까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마가의 이런 진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그렇게 한 평생을 살다 가는 거니까요. 저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나보다 더 우아하고 고상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복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관계를 실제로 이해하는 일만이 아니라 그런 영적인 세계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일 조차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쓸 틈이 별로 없습니다. 나에게 다른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참고문헌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과 각주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논문을 써 본 분들은 잘 알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논문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이 진술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선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차이를 이해해야 하며, 그것이 어떻게 동일화 했는가를 살펴야 하겠지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그의 일, 가르침, 궁극적으로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 전체를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문법적으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야 합니다. 전자는 예수가 주어이고, 후자는 예수가 목적어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우리의 공부 진행에 따라서 차츰 밝혀질 테니까 오늘은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요? 아니 그를 알려고 노력이나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요? 아니 이 세계를 알려고 노력이나 할까요? 오늘 우리는 내 아내, 혹은 내 남편, 내 자식과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알고 있을까요? 아니 그들을 알려고 노력이나 할까요? 그 모든 것들은 정물화처럼 그렇게 죽은 듯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우리의 기분을 띄우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감상하고 있을 뿐이다.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히히 거리는 주부들처럼 (여성분들, 기분 나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자기 기분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종교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살아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출가한 후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러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소위 공생애가 핵심입니다. 그 기간은 짧게 잡으면 1년여, 길게 잡으면 2년여가 됩니다. 다른 종교창시자나 성인들과 비교할 때 전체 삶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 기간도 지나치게 짧았습니다. 3년짜리 신대원 공부보다 짧은 기간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좀 더 오래 사셨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그리고 유럽의 역사는, 전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부처님처럼 천수를 다하셨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연한 상상이었습니다. 어쨌든지 엄청나게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성구사전에서 “복음”(에방겔리온)과 그것의 동사형인 “복음을 전하다”(에방겔리조)라는 항목을 찾아보니까, 마태복음에 두 번, 마가복음에 여섯 번, 누가복음에 네 번 사용되었네요. 공관복음서 중에서 길이가 가장 짧은 마가복음이 이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고, 가장 긴 마태복음이 가장 적게 사용했습니다.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웬일인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로고스, 또는 빛과 어두움 같은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요한복음서 기자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단어를 촌스럽게 생각한 걸까요? 바울의 편지에는 이 단어가 수도 없이 자주 나옵니다. 어쨌든지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1:1, 14,15, 8:35, 10:29, 13:10)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짜고짜로 <복음>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가는 무슨 이유로 자신이 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책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했을까요?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다른 종교를 택하든지 아니면 종교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한 인생이니까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마가의 이런 진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그렇게 한 평생을 살다 가는 거니까요. 저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나보다 더 우아하고 고상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복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관계를 실제로 이해하는 일만이 아니라 그런 영적인 세계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일 조차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쓸 틈이 별로 없습니다. 나에게 다른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참고문헌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과 각주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논문을 써 본 분들은 잘 알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논문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이 진술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선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차이를 이해해야 하며, 그것이 어떻게 동일화 했는가를 살펴야 하겠지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그의 일, 가르침, 궁극적으로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 전체를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문법적으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야 합니다. 전자는 예수가 주어이고, 후자는 예수가 목적어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우리의 공부 진행에 따라서 차츰 밝혀질 테니까 오늘은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요? 아니 그를 알려고 노력이나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요? 아니 이 세계를 알려고 노력이나 할까요? 오늘 우리는 내 아내, 혹은 내 남편, 내 자식과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알고 있을까요? 아니 그들을 알려고 노력이나 할까요? 그 모든 것들은 정물화처럼 그렇게 죽은 듯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우리의 기분을 띄우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감상하고 있을 뿐이다.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히히 거리는 주부들처럼 (여성분들, 기분 나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자기 기분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종교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살아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