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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1일 예수와 천사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시험받는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을 돕는 천사들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짐승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처럼, 이제 천사들이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성서는 천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그것만 주제로 삼아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더라도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겁니다. 성서는 타락한 천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기 합니다. 그게 사탄이겠지요. 이 자리에서 천사가 과연 있냐, 없냐 하고 묻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늘 그런 방식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것을 놓치는 수가 많습니다. 원래 실제로 있는 것도 근원적으로는 없을 수 있으며, 지금 당장 없다고 해서 실제로도 없는 게 아니기도 합니다. 우리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확인할 수 있는 사물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1차원에 머물고 마는 겁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들도 역시 우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왕에 무엇이 있나, 하는 말이 나왔으니까 다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있나요?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있나요? 아니면 미래에 있게 될 것인가요? 그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게 될는지, 아니면 지금 우리의 삶과 결속될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은 더 궁극적인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나요? 그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그 어떤 분인가요? 그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나요? 만약 하나님을 어떤 사물로 생각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전혀 새로운 존재론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식할 수 없을 겁니다.
천사가 예수님을 도왔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무엇인지 여러분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자신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저는 그것에 관해서 구체적인 설명은 못하지만 그 사실 자체만은 인정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눈에 공통적으로, 공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나타나는 그 신비한 메신저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흡사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요정과 유령이 자주 등장하듯이 이 세상의 삶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는 그런 힘들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 천사가 없다면 우리 삶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을 겁니다. 천사가 없는 우리의 삶은 그저 생존본능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단백질 덩어리의 소통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개인이나 집단이나 인간의 삶은,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세계는 그것을 초월하는 힘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힘들이 성령이며, 그것의 동화식 표현이 곧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천사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천사를 경험한 적이 있나요? 아기의 숨결에, 별빛 속에, 남녀의 사랑 속에, 바람과 파도에도 천사들이 춤을 추며 함께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기만 하면 곳곳에서 우리를 돕는 천사들이 보이게 될 겁니다.
주님, 천사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허락해주십시오. 아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시험받는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을 돕는 천사들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짐승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처럼, 이제 천사들이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서 예수님을 도왔습니다.
성서는 천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그것만 주제로 삼아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더라도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겁니다. 성서는 타락한 천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기 합니다. 그게 사탄이겠지요. 이 자리에서 천사가 과연 있냐, 없냐 하고 묻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늘 그런 방식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것을 놓치는 수가 많습니다. 원래 실제로 있는 것도 근원적으로는 없을 수 있으며, 지금 당장 없다고 해서 실제로도 없는 게 아니기도 합니다. 우리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확인할 수 있는 사물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1차원에 머물고 마는 겁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존재하게 될 것들도 역시 우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왕에 무엇이 있나, 하는 말이 나왔으니까 다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있나요?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있나요? 아니면 미래에 있게 될 것인가요? 그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게 될는지, 아니면 지금 우리의 삶과 결속될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은 더 궁극적인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나요? 그는 앞으로 존재하게 될 그 어떤 분인가요? 그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나요? 만약 하나님을 어떤 사물로 생각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전혀 새로운 존재론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식할 수 없을 겁니다.
천사가 예수님을 도왔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무엇인지 여러분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자신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저는 그것에 관해서 구체적인 설명은 못하지만 그 사실 자체만은 인정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눈에 공통적으로, 공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나타나는 그 신비한 메신저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흡사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요정과 유령이 자주 등장하듯이 이 세상의 삶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는 그런 힘들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 천사가 없다면 우리 삶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을 겁니다. 천사가 없는 우리의 삶은 그저 생존본능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단백질 덩어리의 소통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개인이나 집단이나 인간의 삶은,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세계는 그것을 초월하는 힘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힘들이 성령이며, 그것의 동화식 표현이 곧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천사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천사를 경험한 적이 있나요? 아기의 숨결에, 별빛 속에, 남녀의 사랑 속에, 바람과 파도에도 천사들이 춤을 추며 함께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기만 하면 곳곳에서 우리를 돕는 천사들이 보이게 될 겁니다.
주님, 천사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허락해주십시오. 아멘.
적극적으로..아멘!!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