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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23일 버림과 따름 (1)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을 들은 시몬 형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시몬 형제의 그물을 왜 언급했을까요? 사실 어떤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긴박한 순간에 그물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여기에 마가의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아닌지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의 명확한 실체를 잡아내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겠지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 마저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읽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시각은 잘 알려진, 무난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서 전체의 관점에서 조금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입니다. 이런 해석학적 순환은 성서 텍스트의 부분에 대한 오해를 막아주기도 하고, 그것의 보다 심층적 인식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신약성서 전체의 주제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는다면 그물보다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버린다.”는 사실보다는 누구를 “따른다.”는 사실이 훨씬 큰 무게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버린다는 사실과 따른다는 사실이 결국 같은 말이 아닐까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후자가 더 중요한 것처럼 주장할까요? 물론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물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를 따를 수 없으며, 따르겠다고 결단하지 않으면 그물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버린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는 해석과 따른다는 해석에 무게를 두는 해석은 궁극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즉 그분의 부르심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청이 강력할 때만 우리에게 버린다는 사실이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에서 버리는 일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약간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 세상에서 모든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들은 그걸 바로 주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들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그런 일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일반화하면 신앙의 본질이 왜곡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앙에서는 자기가 버린 것,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서 결국 자기가 따라야 할 분에 대한 생각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그 관심이 편집증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들은 자신의 저서를 통한 수입이나 집회 인도를 통한 수입이 충분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받는 모든 목회비를 다시 교회 헌금으로 바친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내고 있는 물질을 포기한다는 것은 칭찬받을만한 것이긴 하지만, 그런 걸 사람들에게 떠벌인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은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설교의 중심도 역시 무엇을 “버리라.”는 데 놓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버려야 할 것들이 분명히 많습니다만 그런 것이 복음의 중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물을 버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주님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겠지요. 그 주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시켜야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물을 버리는 데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곧 복음의 본질을 분별하는 일과 연관됩니다.
주님, 그물을 망각할 정도로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아멘.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을 들은 시몬 형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시몬 형제의 그물을 왜 언급했을까요? 사실 어떤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긴박한 순간에 그물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여기에 마가의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아닌지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의 명확한 실체를 잡아내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겠지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 마저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읽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시각은 잘 알려진, 무난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서 전체의 관점에서 조금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입니다. 이런 해석학적 순환은 성서 텍스트의 부분에 대한 오해를 막아주기도 하고, 그것의 보다 심층적 인식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신약성서 전체의 주제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는다면 그물보다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버린다.”는 사실보다는 누구를 “따른다.”는 사실이 훨씬 큰 무게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버린다는 사실과 따른다는 사실이 결국 같은 말이 아닐까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후자가 더 중요한 것처럼 주장할까요? 물론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물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를 따를 수 없으며, 따르겠다고 결단하지 않으면 그물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버린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는 해석과 따른다는 해석에 무게를 두는 해석은 궁극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즉 그분의 부르심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청이 강력할 때만 우리에게 버린다는 사실이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에서 버리는 일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약간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 세상에서 모든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들은 그걸 바로 주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일들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그런 일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일반화하면 신앙의 본질이 왜곡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앙에서는 자기가 버린 것,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서 결국 자기가 따라야 할 분에 대한 생각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그 관심이 편집증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들은 자신의 저서를 통한 수입이나 집회 인도를 통한 수입이 충분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받는 모든 목회비를 다시 교회 헌금으로 바친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내고 있는 물질을 포기한다는 것은 칭찬받을만한 것이긴 하지만, 그런 걸 사람들에게 떠벌인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은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설교의 중심도 역시 무엇을 “버리라.”는 데 놓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버려야 할 것들이 분명히 많습니다만 그런 것이 복음의 중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물을 버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주님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겠지요. 그 주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시켜야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물을 버리는 데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곧 복음의 본질을 분별하는 일과 연관됩니다.
주님, 그물을 망각할 정도로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아멘.
우리의 시선이 버리는 것에 훨씬 더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따르는 것에 비해 버리는 것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즉각적일 수 있고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결단적인 것 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따르는 것은 물론 지금 결단을 요구 받지만
미래에 관한 것이고 과정이며 그 장래가 지금 확실치 않은
그것이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어쩔 수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일종의 신앙 성숙 과정으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신앙 성숙은 목사님 말씀하신대로 주님께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그 시작은 일단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자기 것을 버리는 것으로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좇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좇으라 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인간적인 결단이나 행위들이 초점이 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갖는 한계일 수 있기에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뭔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바른 신앙생활은 아니기에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죠.
오늘의 교회들에서 보이는 그런 열정적 종교행위들도 역시 같은 선상에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 것을 강조하고 그렇게 해야 왠지 신앙생활을 하는것처럼 느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역시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에서는 전혀 의지적인 결단의 부분은 강조되면 않되는것인가?
그런 결단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기다리는 것이 최선인가?
목회의 현장에서 더구나 지금까지 배우고 행했던 설교의 패턴에서
말씀의 적용이라고 생각했던 삶에의 촉구가 과연 가능한가?
그런데 역시 인간의 조급성과 한계가 그 답이라는 결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 없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본성인 우리의 연약함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