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것 같소. 교회에 여러 종류의 모임이 많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소.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은 크오. 더구나 종교적으로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더 크오. 믿는 사람들끼리의 친교를 부정할 수는 없소. 교회 전통도 그걸 무시하지 않소. ‘코이노니아’(친교)는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적 덕목이었소. 코이노니아는 신앙의 근본이라고 봐야 할 거요.
사람과의 관계에 치중하다보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소. 양쪽의 관계가 서로 상승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그게 쉽지 않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이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정리해야겠소. 사람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명쾌하게 구별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말이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소. 그렇다면 믿는 사람들의 관계가 하나님 나라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했지 ‘너희’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지 않으셨소. 예를 들어 설명하겠소. 여기 합창단이 있소. 합창단원이 없으면 노래를 부를 수 없소. 그들이 화합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없소. 그들 가운데 음악이 있소. 그러나 그들이 바로 음악은 아니오. 그들은 음악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오. 단원들끼리의 화합이 중요하다고 해서 친교에 치우치면 결국 그 합창단은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거요. 교회는 영적인 노래를 부르는 합창단이오. 온전히 노래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으면 합창단원끼리의 친교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오. 이 설명이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소. 신자들끼리의 친교에 떨어지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축소되는 거요. 양쪽의 관계가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적으로 창조적인 결과를 맺으려면 지금 교회 공동체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성찰해야만 하오.
내 이야기가 좀 복잡해졌소. 간단히 정리하겠소. 사람 만나러 교회에 나가지는 마시오. 그렇게 습관이 붙어서 어쩔 수 없다면, 조금씩 고쳐 나가보시오. 사람 만나는 것에 너무 큰 비중을 두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오. 첫째,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오. 자칫 신앙마저도 흔들릴 거요. 둘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만의 ‘끼리집단’이 생기오. 예수 믿는 사람끼리만 몰려다닌다면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소. 사람은 세상에 널려 있으니 정 사람이 그리우면 세상 사람들을 만나시오. (2010년 6월28일, 월요일, 꾸물꾸물한 날씨)
어쩌다 교회들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각종 (?)행사 사진들이나, 목사님들의 단체사진,
그리고 게시판들을 보자면, 어김없이 어떤 전형이 보여지곤 합니다.
비슷비슷한 언어들, 표정들, 게다가 어떨땐 패션까지.
모모 한다는 교회는 그것대로 세련된 카페같은 분위기, 이민교회들은 또 그것대로의 그 분위기.
하나님 만드신 각개 각인의 야성(생명)을 찾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니면, 오랜 세월 종교적이고 피상적인 삶 때문에, 그 생명력들이 오히려 희미해 진 것인지.
우리 정체성이
'피조물' 이라는 것만 제대로 알아도,
외로움과 결핍들 속에서도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짦은 생각을 합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서울샘터 교회 예배후 인사를 드렸지만
다비아에서는 처음 인사 올립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치중하다보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소."
요즘 사람들에게 예전예배에 대한 저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마다 너무 가벼운 분위기에 영 예배드리는 느낌이 안듭니다.
샘터교회에서 경건하고, 진중한 예배를 맛 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매일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