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8일
마르다와 마리아
눅 10:38-42절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독립 전승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차이가 난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들어왔을 때 마르다는 부엌일에 충실했고 마리아는 말씀 듣는 일에 충실했다고 하는 반면에, 다른 복음서는 마르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조금 자세하게 보자. 마태(26장)는 예수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향유를 식사하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는데, 제자들이 이 여자의 행동을 비판했다고 전한다. 마가(14장)도 마태와 거의 비슷하게 말한다. 마태와 마가 이야기에는 마르다가 등장하지 않는다. 마태가 마가의 자료를 기초로 기록한 것이다. 요한(12장)은 마태와 마가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누가 이야기까지 보충해서 이야기를 전한다.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아 있었으며, 곧 마리아가 등장해서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다. 마태, 마가, 요한 모두 이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제자들의 비판을 거론하면서(요한은 가룟 유다를 지칭한다.) 마리아의 행위를 기독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가복음(7:36 이하)에는 마리아가 아니라 죄 지은 여자로 나온다. 예수에 관한 전승이 여러 갈래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를 초대했다는 누가복음의 진술은 파격적이다. 설교에서도 언급했지만 젊은 여자가 낯선 남자를 집으로 들이는 일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한복음에는 항상 오빠 나사로가 함께 등장하고, 마태와 마가에는 마르다가 등장하지 않는다. 누가는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어디서 전해들은 것일까?
ㅎㅎ 마르다가 뭔가 손해보는 듯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말하다보니 별로 그래 보이지도 않고,
결국 '소 키우기'로 해결했네요.
잘했어요.
전통적인 수도원에서 중요한 일의 하나가 바로 소 키우기에요.
소 키우기와 말씀 읽기는 똑같은 영성에 속하는 거니
속 편하게 소 키우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샘터교회 주보 표지에
마르다와 마리아 사진이 실렸는데,
서양 사람들은 왜 여성들을 뚱뚱하게 그렸는지 몰라요.
인물화 그림이 대개가 그럴 걸요?
설교 중 에드립으로
중세기 서양 사람들에게는 살찐 여성이 매력적이었고,
동양 사람들에게는 양귀비처럼 날씬한 여성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는데,
잘 본 건지 모르겠어요.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서,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 하지만,
마리아의 선택이 영성의 중심에 속한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목사님,
사실 저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대목이 나오면 늘 좀 불편합니다.^^;
여러 복음서에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같은 여자사람 혹은 신앙인으로서
좀 따라잡기(?)가 힘든 대상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마르다가 나오면 상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요.
그래서 마르다를 좀 변명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새롭게 느끼는 것은 달란트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밀착할 수 있는 타고난 달란트.
누구는 세상없이 말씀 앞에 머물고
누구는 전체적인 진행을 위해 실무를 담당하는 모습.
그것은 다 필요한 것이지만 각자의 달란트의 '정도'로 드러나는 모습인가 합니다.
저는 여기서 달란트는 '다양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영성에 대한 '측량치'를 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왠지 그냥 주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시골할매가 목회자보다 더 깊이가 있어버릴 수 있는 대목일 수도 있어요.
공평하신 하나님.....^^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에 찾아오신 예수님께 마르다와 마리아가 또 대조적인 태도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마르다는 대번에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하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어요.
마르다는 예수님께 엄청난 믿음의 고백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열어라고 하실 때
마르다는 그녀의 고백과 영 연결이 안되는 말을 하구요...ㅜㅜ
마르다의 집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의 발치에 앉을 만큼 주께 밀착하여 몰두하고 있는 마리아를
아무도 터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고,
그런 마리아를 불러 일하게 하려는 마르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일을 안하고 게으른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몰입하여 있는 마리아를 마르다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이 대목에서 게으름과 영성과는 어려운 구별을 해야합니다만)
결국 각자의 달란트의 양 만큼
어떤 선택 가운데 있게 되는데
그 선택 가운데 있는 것이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다를 변명하려고 시작했는데
마르다와 마리아 ,
모습 그대로를 그냥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달란트의 양이 같아서 다같이 주님 발밑에 있으면
소는 누가 키웁니까.
이 또한 주님의 은혜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있는 모습대로 받으실 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