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6일- 야고보와 요한

조회 수 6159 추천 수 34 2006.05.26 23:15:36
2006년 5월26일 야고보와 요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막 1:19)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도의 대표를 베드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3명의 수제자에는 베드로를 포함해서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산위에서 신비한 모습으로 변화하던 그 순간에 함께 했으며, 공생애 마지막에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럽게 기도하실 때도 함께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가 먼저 부름을 받았고, 그 뒤로 야고보와 요한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누가 뭐래도 베드로는 사도 중에서 수장입니다. 그렇다면 수제자에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포함되는 게 순리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야고보와 요한이 포함되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내막이 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어느 날 예수님에게 와서 나중에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자기 두 아들이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요샛말로 치맛바람이 좀 센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도 시몬 형제를 설명할 때는 단순히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라고 했는데, 이들을 설명할 때는 굳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라고 한 걸 보면 그들 부모 양쪽이 모두 좀 특별하긴 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전의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몬 형제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때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는데 반해서 야고보 형제들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는 건 단지 시간적인 차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 어떤 숨은 뜻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물을 던지거나 깁는 것은 어부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라는 점에서 어떤 특별한 차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단지 마가는 그들이 아주 일상적인 일에 충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시몬 형제가 부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떤 위대한 사건, 어떤 생기(生起)는 자신이 의도하는 게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서 이끌림을 당할 때만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형제들이 세계 역사를 바꿔놓겠다는 그런 의지에 불탔다기보다는 그저 자신들의 일상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겉으로는 별 볼일 없는 일에 충실하던 그들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다른 어부들과 똑같이 그물을 깁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이 보셨다는 겁니다.
저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섰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들에게 어떤 비상한 능력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눈여겨볼 까닭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복음서에 묘사된 사도들은 우리들과 비교해서 특별한 능력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체포 순간과 처형 순간에도 별로 이렇다 할 행동을 펼치지도 못한, 어떻게 보면 무기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가본 사람들이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남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도 집단에 대해서 무언가 실망감과 분노를 느낄 만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 사도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의 토대가 잡혔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세계 역사적 사건이 구체화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여기에 무슨 힘이 작용했을까요?
오늘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을 깁고 있는 그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그들 곁으로 예수님이 다가갔습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우리가 모르는 순간에 예수님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런 순간을 우리가 거의 놓치고 있다는 게 문제겠지요.

주님, 우리게 맡겨진 일상에 충실하면서 주님이 다가오시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아멘.

[레벨:8]김인범

2006.05.26 23:52:23

주님께서 분명한 의도를가지고 다가오셨다면
과연 우리가 모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혹 우리가 모른다고 할찌라도
그래서 주님이 그냥 지나치실까요?

목사님이 이 글 전에 올리셨던 글
'따름과 버림'을 읽으면서 나름으로 많은 생각을 하다가
얻어진 하나의 귀결이
따름은 불가항력적일 것이고
버림은 자의적이어야 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래서 따름 보다 버림이 강조되고 더 우리적일 수 있겠단 생각입니다.

그 분의 부르심이 예사 부르심이 아니고
아니 그 분 자체가 예사 분이 아니신데
그 부르심에 우리가 과연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광야의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과
자신의 부족과 불가능을 잘 알기에 거부하는 모세
마침내 화를 발하시면서까지 그를 부르시고야 마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후의 모세의 삶은
비약적 해석이지만 그의 사역을 통해 보는 그의 삶은
버리는 것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저는 주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단 부르심을 입은 성도된 우리들의 문제겠죠.
늘 주님을 향하는 열려있는 마음과 몸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오늘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생활 원리겠죠.

그 때
목사님의 오늘 큐티의 기도가 등장하는 거겠죠.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5.27 23:50:17

늘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이라!
그렇지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주님이 누구인가,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의 재림은 무엇가 등등의 질문을 쉬지 말아야겠네요.
좋은 주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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