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간(12)

조회 수 4434 추천 수 3 2010.05.27 23:23:07

 

나는 바이체커의 <물리학의 세계상>을 아직도 탐독하고 있다. 신을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의 보충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졌다. 즉 인식의 한계가 부단히 확대되면서 항상 신이 옆으로 내밀리고, 거기에 따라서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않는 것에서가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서 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신은 미해결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해결된 문제에서 우리를 붙잡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신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고난, 죄책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 문제에 대해서는 타당한 것이다. 오늘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신을 제쳐두는 실정이다. 지난날에도 신 없이 이런 문제에 접근했다. 기독교만이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중략> 신은 우리의 가능성의 한계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죽음 앞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 질병에서만이 아니라 건강에서, 죄에서만이 아니라 행위에서 인식되기를 원하신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놓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중심이지 미해결의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나 삶의 중심에서 나오면, 그 대답도 삶의 중심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에게서는 ‘기독교적인 문제’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본회퍼, 옥중서간, 196 쪽, 1944년 5월25일)

 

 

     본회퍼가 언급한 바이체커는 아마 물리학자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를 가리키는 것 같소.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나중에 독일 대통령을 지냈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작은 책도 쓴 것 같은데, 확실한지는 모르겠소. 바이체커 가문은 명문가라고 하오. 몇 형제들이 학계와 정치계에서 크게 활동을 한 모양인데, 누가 누구인지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소. 본회퍼는 바이체커의 책을 통해서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입장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된 것 같소. 그 입장은 하나님을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보충해주는 존재로 간주하는 기독교 신앙이 잘못이라는 것이오. 보통 우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소.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믿으라고 말이오. 이런 방식의 신앙은 결국 기독교 신앙을 삶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거요. 본회퍼는 철저하게 삶의 중심에서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려고 했소. 오해는 마시구려.

     그대는 이 대목에서 본회퍼에게 질문하고 싶을 거요. 병, 죽음, 내세는 기독교 신앙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느냐고 말이오. 그런 뜻은 아니오. 그런 주제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다뤄져야 하오. 본회퍼가 문제로 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의 중심 문제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이오. 정치, 물리, 예술 등, 삶의 중심에 속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고, 단지 외로움과 죽음 같은 문제에만 할 말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는 거요. 삶의 현실들을 놓치고 종교성에만 머물러 있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오.

     오늘 한국교회는 본회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어야 하오. 거의 모든 교회가 종교성에 떨어져 버렸소.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패러다임에 묶여 있소. 기복주의 신앙도 전형적인 종교성이오.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종교적 욕망 말이오. 청중들의 종교적 욕망을 기술적으로 다룰 줄 아는 목사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소. 청중들과 목사들의 종교적 욕망이 그런 교회 구조에서 스파크를 일으켜 큰 성과를 내는 것이오. 노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요. 그대는 내가 너무 비판적으로만 보는 것처럼 보이오? 대형교회 운동을 성령의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니, 그대 편한 대로 생각하시오. 본회퍼의 신학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삶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문제에만 열광적으로 매달려 있다는 건 분명하오. (2010년 5월27일, 목요일, 가을 기분이 나는 상쾌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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