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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4일 하나님의 나라 (1)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우리는 앞으로 당분간 예수님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나눌 생각입니다. 그 당분간이 일주일이 될지, 아니면 두 주일이 될지, 또는 한 달이 될지는 두고 보아야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투 데우”라고 합니다. 그냥 간단히 ‘바실레이아’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여러 관점에서 이 바실레이아를 생각하겠지만, 일단 그리스도교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이 문을 두드린다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이 사실을 전제합니다. 신약성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사실 앞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사실이 느슨해진다면 복음의 긴박성은 그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시나브로 하나님 나라를 망각하는 중입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부각되는 것은 교회 성장과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욕망입니다. 오늘 우리의 설교와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우주론적 지평이 상실되고 단지 교회 확장과 신자들의 종교적 감수성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걸 위기로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설교되지 않는 이 현실을 위기로 느끼는 설교자와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걸 자꾸 논리적으로 따지다 보면 이 글의 기본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단하게 한 마디만 짚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건 곧 하나님 나라를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회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천국”, 즉 “하늘의 나라”라는 용어가 친숙합니다. 신약성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를 구별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팔복인 마태복음 5:3절은 “하늘의 나라”라는 뜻으로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우라논”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하나님이 고대인들에게 거의 동일어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두 단어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교회 현장에서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어떤 공간 정도로 이해됩니다. 심지어 천국에 가면 황금 면류관을 받을 사람과 개털 모자를 받을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천국이 교회 안에서 흡사 노후보장 보험 상품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죽음 이후에 그런 천국이 없다고 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는 죽음 이후의 생명이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문제는 또 하나의 다른 주제이고,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에 관한 가장 초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조금 성격이 급한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 같군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든지 천국이라고 하든지 그건 둘째 치고,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위에서 천국이라는 용어가 오용되었다고 설명했듯이 시공간적인 차원으로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흡사 창세기의 에덴동산이나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처럼 모든 아름다운 것이 구비된, 그래서 완전 복지가 실현된 어떤 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실레이아는 우리의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표상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선입관을 갖지 말고 그 사실 안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저도 크게 아는 건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보다 약간, 어쩌면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미미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윤곽을 그릴 수 있을 뿐이겠지요. 우리가 나눌 이야기의 가장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당신의 말씀에 내 영혼의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아멘.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우리는 앞으로 당분간 예수님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나눌 생각입니다. 그 당분간이 일주일이 될지, 아니면 두 주일이 될지, 또는 한 달이 될지는 두고 보아야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르게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투 데우”라고 합니다. 그냥 간단히 ‘바실레이아’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여러 관점에서 이 바실레이아를 생각하겠지만, 일단 그리스도교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마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이 문을 두드린다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이 사실을 전제합니다. 신약성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사실 앞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사실이 느슨해진다면 복음의 긴박성은 그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시나브로 하나님 나라를 망각하는 중입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부각되는 것은 교회 성장과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욕망입니다. 오늘 우리의 설교와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우주론적 지평이 상실되고 단지 교회 확장과 신자들의 종교적 감수성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걸 위기로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설교되지 않는 이 현실을 위기로 느끼는 설교자와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걸 자꾸 논리적으로 따지다 보면 이 글의 기본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단하게 한 마디만 짚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건 곧 하나님 나라를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회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천국”, 즉 “하늘의 나라”라는 용어가 친숙합니다. 신약성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를 구별할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팔복인 마태복음 5:3절은 “하늘의 나라”라는 뜻으로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우라논”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하나님이 고대인들에게 거의 동일어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두 단어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교회 현장에서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어떤 공간 정도로 이해됩니다. 심지어 천국에 가면 황금 면류관을 받을 사람과 개털 모자를 받을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천국이 교회 안에서 흡사 노후보장 보험 상품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죽음 이후에 그런 천국이 없다고 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는 죽음 이후의 생명이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문제는 또 하나의 다른 주제이고,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에 관한 가장 초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조금 성격이 급한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 같군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든지 천국이라고 하든지 그건 둘째 치고,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나라는 위에서 천국이라는 용어가 오용되었다고 설명했듯이 시공간적인 차원으로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흡사 창세기의 에덴동산이나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처럼 모든 아름다운 것이 구비된, 그래서 완전 복지가 실현된 어떤 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실레이아는 우리의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표상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선입관을 갖지 말고 그 사실 안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저도 크게 아는 건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보다 약간, 어쩌면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미미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윤곽을 그릴 수 있을 뿐이겠지요. 우리가 나눌 이야기의 가장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당신의 말씀에 내 영혼의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아멘.
저도 모르게 자꾸 큰 기대가 되는군요.
저의 기대에 너무 큰 신경쓰지 마시고
계속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통찰하고 경험한대로 한 올 한 올 풀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