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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고, 그가 인용한 말씀으로 들어갑시다. 무의식적거나 의도적인 작은 실수들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빠진 사본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인용한 말라기 3:1절은 하나님이 ‘일꾼’을 보내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뜻이겠지요.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도 일을 하실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실 때 인간에게 의존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뛰어난 인물이 하나님의 일을 독점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또한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일꾼이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알면 일꾼의 정체성과 그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한 말라기서가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그 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일은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준비한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준비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일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배타적인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배타적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민들레꽃을 직접 피울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하십니다.
간혹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대신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겠다고 야심찬 꿈을 키우기도 합니다. “젊은이며, 야망을 가져라!”는 식의 선동이 교회의 강단까지 지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생각이야 대견한 일이겠지요. 마가가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청빈하게 살면서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는 삶은 격려 받을 일입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그런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분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삶이 아무리 위대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 자체는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매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만약 오늘의 교회가 주님의 일인 구원 사건에서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훨씬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자기 칭송과 업적, 자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포기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고, 그가 인용한 말씀으로 들어갑시다. 무의식적거나 의도적인 작은 실수들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빠진 사본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인용한 말라기 3:1절은 하나님이 ‘일꾼’을 보내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뜻이겠지요.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도 일을 하실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실 때 인간에게 의존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뛰어난 인물이 하나님의 일을 독점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또한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일꾼이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알면 일꾼의 정체성과 그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한 말라기서가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그 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일은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준비한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준비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일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배타적인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배타적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민들레꽃을 직접 피울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하십니다.
간혹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대신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겠다고 야심찬 꿈을 키우기도 합니다. “젊은이며, 야망을 가져라!”는 식의 선동이 교회의 강단까지 지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생각이야 대견한 일이겠지요. 마가가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청빈하게 살면서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는 삶은 격려 받을 일입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그런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분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삶이 아무리 위대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 자체는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매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만약 오늘의 교회가 주님의 일인 구원 사건에서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훨씬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자기 칭송과 업적, 자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포기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구원은 오직믿음으로 라는말로 이해해도되는지요 여기에서 맏음이라는단어는 -오직하나님에 게서만가능하다는말을 의미함이다 라고 이해해도 되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