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3일- 따름의 맹목성

조회 수 3724 추천 수 28 2006.06.23 23:58:54
2006년 6월23일 따름의 맹목성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막 1:36)

오늘 본문에 따르면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앞에서 제자로 부름 받은 네 명 중에서 시몬을 제외한 세 명을 일컫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겠지요. 그들이 제자들뿐이라고 했다면 마가가 그들의 이름을 거명했을 겁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이들 세 명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 일행과 합류한 그 이외의 사람들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들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한적한 곳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행선지를 알려주고 가셨던 걸까요? 또는 모든 제자들이 흩어져서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면서 찾아 나선 것일까요?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장소를 제자들이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어촌에서 기도할만한 한적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루터는 그들이 급하게 따라갔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아무래도 쫓기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갑자가 유명 인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스승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 제자들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올라가기 마련이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쫓기기 마련입니다.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부흥하는 교회의 신자들은 바쁩니다. 바쁜 정도가 아니라 쫓긴다고 말해야 옳겠지요. 이것을 신앙의 신바람이라느니, 신앙의 열정이라느니 하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러 한적한 곳에 나가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급하게 따라가 불러내듯이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조금 뒤집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이 제자들의 행동은 잘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할 만큼 기도하고 돌아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게 바른 태도는 아니었을까요? 이 문제는 저도 별로 확신이 없으며, 더구나 본문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로 시간을 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정체성을 가진 제자로서 산다는 게 무조건 예수님을 귀찮게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 이후를 따라서 읽다보면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제자들의 급한 목소리에 대해서 예수님은 별로 적극적으로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걸 보면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엇박자로 나갈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대목만이 아니라 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오해한 적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의 신앙적 행동에 대해서 늘 내부 검열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깨달음의 경지를 얻기 위한 게 아니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하기 위해서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록 실수하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녀야 합니다. 저자거리에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다니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는 곧 “그리스도를 뒤따름”이라는 본훼퍼의 주장은 옳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구체적으로 그를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저는 예수님을 자유롭게 놓아드리는(?) 여유를 찾아보는 것도,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위기일지 모르지만, 따름의 맹목성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일시적으로 말입니다.

주님, 우리의 따름이 예수님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기 원합니다. 아멘.

[레벨:1]한진영

2006.06.25 01:12:48

반질 반질한 손등으로 콧물을 훔치며
엄마를 허둥지둥 따라가는 아이의 이미지가 너무 선명하게 상상이되네요..
눈이 휘둥그레지게 북적대는 활기찬 시장통에 온통 정신이 팔리더라도
바쁜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시는 엄마의 치마자락을 행여 놓칠까 움켜쥐고 졸졸 좇는 아이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엄마같은 주님의 앞장 서심을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주님을 좀 놓아 드리자는 거지요.
붙잡고 징징거리며 방해 놓지 말라는 말씀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고 갑자기 더 앵앵 거리고 싶어지네요 (ㅠ_ㅠ)

[레벨:8]김인범

2006.06.25 12:16:14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며 삶에 신앙이 배여지면
아마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라고 보는데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늘 그 치마자락을 붙들고 때로 앵앵거리는 그 시간들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 역시 결코 수치가 아님을 알고
아니 그런 오랜 시간들의 흐름이 없이는 결코 거기 갈 수 없음도 분명히 할 때
간혹 목사님 말씀대로 주님을 자유롭게 놓아 드리는 수준까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더 큰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되겠지요.
맹목성은 신앙의 처음 부분에선 필연적일 거란 생각이구요
문제는 늘 변함없이 맹목성이 유지된다는데 있지 않을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6.25 23:45:25

한진영 님은 그 장면을 나보다 더 리얼하게 그려주셨군요.
어머니 치마자락을 붙들고 앵앨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귀엽군요.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렇겠지요.

김인범 목사님,
<맹목적인 합리성>, 또는 <합리적인 맹목성>,
괘찮은 개념 같군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맹목적이며 동시에 합리적이다,
대충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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