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 요한복음 묵상(10)

조회 수 4271 추천 수 0 2013.05.02 22:38:40

 

   1:14절에 예수의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한다. 은혜와 진리는 보기에 따라서 궁합이 맞지 않는 결합이다. 은혜는 종교적인 개념인데 반해서 진리는 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는 증거다. 복음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진리다. 은혜는 진리로 나타나야 한다. 참된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은혜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단순히 낱말 뜻인 ‘참된 이치’로만 알면 곤란하다.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탈은폐의 능력이다. 은폐된 세계를 드러내는 능력이다. 그런 현상 자체를 가리킨다. 이는 곧 세상이 은폐되어 있다는 뜻이다. 생명도 은폐되어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레벨:16]맑은그늘

2013.05.03 01:39:40

'예수의 복음이'를 '예수가'로 바꾸면 정확하게 전달이 됩니다.
부활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3.05.03 23:35:51

그렇지요.
부활이 궁극적인 생명의 현실입니다.
그걸 알면 생명이 보인다는 뜻이겠지요.
그렇게 뚤어보고 살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요.

[레벨:7]2C120

2013.05.06 21:49:17

두 분 대화 내용을 대하면서
  
1. 
은혜와 진리는 보기에 따라서 궁합이 맞지 않는 결합이다. 은혜는 종교적인 개념인데 반해서 진리는 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는 증거다.”
라고 하신 부분에 관해서 :
 
은혜와 진리는 보기에 따라서 궁합이 맞지 않는 결합”인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종교적인 개념인데 반해서 진리는 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은혜와 진리가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요한복음 기자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는 증거다”
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런 진술을 대하면서 드는 의문은
 
(1-1)
이 성경 구절에서의 “진리” 혹은 “실재(reality)”란
철학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요5:33, 8:32, 17:17, 19)
그 “실재”를 “철학적 개념”(?)으로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지?
 
 
(1-2)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라고 하는 것이
종교적 개념인 은혜”(보다 엄밀하게는 영적 개념인 은혜”라고 해야 할 것 같지만)와
철학적 개념인 진리”(?)의 결합(?)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1-3)
“(
다분히)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진리”가
요 1장 14절에 제시된 “진리”인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그런 사고 방식 안에서
'진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어떤 내용인  것인지?
 
등이 궁금해집니다.
 
 
2.
일단
<요한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라는 정 용섭 목사님의 원문 진술로부터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라는 호미 님 진술로 바뀌게 된 것은,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구원 사역, 그분의 사랑과 이 땅에서의 생활과 고통, 혹은
하늘에서의 그분의 영광과 존귀 등등 그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는
그분 자신’
에 대한 인식과 누림보다는,

기독관/기독론에 있어 거의 언제나,
주님의 구원 사역, 그것도 ‘예수의 운명=십자가와 부활’로 단순 치환된,
법리적 구속을 위한 주님의 지상에서의 사역 부분만이
마치 개인적 영성을 위한 보증 수표이자 방편처럼 남발되고 있는 듯한 다비아의 글들에서
그래도 무게 중심이 주님 인격과 관련된, ‘그분 자신’ 쪽으로 조금은 더 옮겨진 진술 형태의 모습이 됨으로써
다비아 기독론에서의 일반적 불균형 모습이 조금은 좀 균형 잡히는 방향으로,
아울러
요한복음에 대한 일반적 진술의 정확성 면에 있어서도 좀더 가까이 가게 된 듯한 방향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라는 측면에서
바뀐 진술 부분은 어느 정도 취할 모가 있다는 생각이고
그런 방향 전환을 위한 노력은 다비아의 글들에서는 좀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지만
 
정 목사님의 기독론이나 기독관 자체가
정통 기독 신앙에서의 기독론과는 워낙 다른 내용인 것으로 보이는 만큼
사실상 무게 중심의 그 같은 전이와 신앙 내용의 방향 전환이란
쉽지 않”거나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3.
<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근거는 부활이다. >
 
라고 수정된 문장에서
그러나, ‘은폐된 세상’이라는 한국어 표현도 부적절해 보이고
예수가 능력이다’라는 주어-서술어 구조에서 귀결되는 의미도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 문장 내용으로 보입니다.
 
 
4.
<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근거는 부활이다.
그렇다.
부활이 궁극적인 생명의 현실이다.
그걸 알면 생명이 보인다는 뜻이다.>
라고 두 분 대화가 합의를 본 단계의 진술에서
근거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내용 및 그 답변에 대한 부연 설명에도 썩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4-1) 
다비아에서 얘기하는 ‘부활’이란 것이 정통 기독교 쪽에서 믿고 이해하는 ‘부활’ 개념과 같은 것인지,
무엇보다 기독론 자체가 다비아 글들을 통해 볼 때 정통 기독교 쪽에서 믿고 이해하는 내용과 같은 것인지
더 점검, 선행되어야 할 듯해 보이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같은 부연 설명 답변 내용은
기독론에 있어 주님의 인격(person)과 주님의 사역(work), 주님의 미덕, 그분의 성육신,
인생을 거치신 그분의 삶, 십자가에 죽으심, 부활, 승천, 승천 후 하늘에서의 사역 등등
그 모든 범주들에 속한 내용들이 오로지 “예수의 운명=십자가와 부활”의 단순 표어로 환치되면서
주 예수님과 관련해 누락된 다른 항목들은
개인적 영성 내지 구원의 확증에 대한 만능약처럼 남발되는 그 ‘부활’이란 개념 아래
묻혀 버리고 있는 상황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듯한, 단순 암기된 공식 내놓듯 안이한 답변처럼 들리고,
더욱이
다름 아닌 성육신을 화제로 하고 있는 요한 복음 1장 18절을 놓고 하는 묵상에서
요한 복음에서 전하는 생명의 복음이”가 아니라 “예수가”를 주어로 해 놓고 나서는
그 근거는 또 마찬가지 정 목사님 표현을 빌자면 "그 밥에 그 나물"(?) 식으로 해서
‘부활이다”라고 해 버리는 것도
썩 공감이 가질 않습니다.
 
(4-2)
다음으로,
부활이 궁극적인 생명의 현실’ (다비아에서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썩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표현인데 하여간) 이니까
그런 고로 ‘부활을 알면 생명이 보인다는 뜻이다’
라고 하는 부연 설명도
성육신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요한복음 1장 18절 묵상 설명으로는
억지로 연결해 짜 맞추려 한 표현 같이 들려서 
신선한 영적 생동감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진술 같아 보입니다.  
 
5.
정용섭 목사님과 호미 님의 대화를 대하면서 개인적 생각은
< 요한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근거는 무엇인가? >
==> <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이 본문 내용이 요1:14 묵상인 점을 감안한다면) 
           세상에 드러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


또는

<
요한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
==> <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이’ 인간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해 번식시키는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

입니다,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한 각각의 답변은 그냥 단답형 어구 하나로 나오지는 않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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