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서는 술과 담배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금기시되었다. 교회에서 목사는 물론이고 권사나 장로가 되려면 술과 담배를 멀리해야만 했다. 교회에 따라서 정도가 다르기는 하나 그것을 신앙의 기준인 듯이 강조하는 교회도 없지 않았다. 주초를 멀리하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의 기준인 양 내세우는 건 신앙의 본질과 형태를 혼동하는 데서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주일에는 돈 내는 식당이나 다방이나 극장에도 가지 말아야만 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리겠으나 그런 정서는 지금도 여전하다. 이혼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떤 목사들은 몇몇 성경 구절을 근거로 이혼을 무조건 반대한다. 생명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이혼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게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처럼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서, 또는 순전히 이기심에 떨어지거나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쉽게 이혼하는 행태가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이혼 여부를 신앙의 기준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조금 예민한 문제를 다루더라도 이해를 바란다. 성과 관련해서 청소년이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위다. 사춘기에 들어서면 남녀 구별 없이 대개는 자위를 배운다. 친구들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자기 몸이 저절로 그렇게 반응하기도 한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내가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자위는 죄라는 말을 교회에서 들었다. 분위기 자체가 금욕적이어서 많은 청소년이 그것으로 죄책감에 빠진다. 억지로 참아보지만 그게 참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기에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떨어진다. 지금은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으니까 이런 문제는 대개 해결되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무슨 말인가? 성 윤리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으며,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달라져야 하는지는 내가 말할 수 없다. 매우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의료상의 임신중절이 태아 몇 주까지 가능한지도 역시 통합적인 접근을 통해서 결정해야 한다. 인간 행위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인 윤리 문제는 정말 어렵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율법주의도 문제이고 율법 무용론도 문제이다. 그렇기에 독단에 떨어지지 말고 폭넓은 대화를 통해서 생명 지향적인 최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다른 하나는 혼전 섹스다. 청교도 신앙에 기울어진 교회에서는 혼전 섹스를 죄로 여긴다.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순결 서약을 의식으로 실행하는 학교가 있었다. 주로 여자 중고등학교다. 요즘 학생들에게 이런 순결 서약식은 개그의 소재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혼전 섹스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성 윤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200년 전 한반도에 살던 어떤 양반 계급 사람이 지금 서울 명동에 나타나서 젊은 남녀의 옷차림이나 애정행각을 보면 세상 말세라고 혀를 차지 않겠는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젊은이들은 혼전 섹스를 비윤리적인 행위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추세가 크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 오남용까지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이게 어렵다. 성 오남용에 기울어지지 않으면서 성적 쾌락을 매도하지 않는 길을 찾기가 말이다. 이런 문제도 역시 사회 통합적인 대화를 통해서 최선의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오늘의 기독교 윤리 신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언급하는지는 모르겠다.
한국교회의 '성적인 인식'은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유교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유교가 말하는 '성 윤리'를 기독교적 성윤리인 것처럼 기준을 삼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웃긴것은 기독교 성윤리가 유교의 성윤리보다 더 유교적인 것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