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5일
<구유>. 구주가 여관에서 방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곳에서도 태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전혀 다른 곳은 곧 구유입니다. 구유는 바로 마구간이나 옥외 건초창고에 있습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장소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 아름다운 곳은 분위기가 좋고 편안하고 쾌적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인간적 품위에 어울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찾습니다. 그러나 구유는 그런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구유보다 쪽방은 오히려 호화로운 편이라고 할 있을 정도입니다. 이 구유는 지난날 수많은 화가가 그린 그림에 나옵니다. 그런 그림에는 황소와 당나귀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이나 태어나신 곳이나 정말 똑같이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동물들이 있는 마구간의 구유에서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어두운 땅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동료와 이웃과 친구와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관에 자리가 없어서 부모와 아기가 다른 곳에 잠자리를 마련했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이제 구주가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바로 완전히 다른 한곳에 머물기 위해서 들어 오셨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바로 이곳은 구주가 단지 문을 두드리며 방이 있는가 하고 묻다가 밖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 아니라 일단 들어오신 곳입니다. 구주는 이미 우리 안에 은밀하게 들어오셔서 우리가 구주를 깨닫고 구주의 함께 하심을 기뻐하는 걸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장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삶과 행동 중에서 고상하고 아름답고, 또는 정의로운 대목만을 머리에 그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부분에서만 구주를 느끼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주가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곳은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같은 곳입니다. 그곳은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라 오히려 더럽게 보일 것입니다. 따뜻하고 다정스러운 게 아니라 섬뜩해 보입니다. 그곳은 인간적인 품위보다는 정반대로 동물의 본성이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교만한 여관이나 겸손한 여관은, 그리고 그 안에서 머무는 우리는 우리 인생의 표면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그 내면에는 어떤 깊이, 어떤 근원이 숨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심연이 숨어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우리는 모두 바로 그런 부분에서는 거지처럼 가난할 뿐입니다. 흡사 ‘돌아온 탕자’와 같으며, 탄식하는 피조물과 같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근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들어오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은 우리의 모든 삶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이처럼 어두운 곳에, 구유에, 마구간에 들어오셨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우리는 그분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그분은 우리를, 우리 모든 각각의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보고, 알아보고, 믿고, 사랑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그에게 다시 인사드리고 반갑게 환영하는 것 말고는 더 이상의 요구가 없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곳에 황소와 나귀가 아주 가깝게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바로 그런 곳에 구주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단단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어두운 곳에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리 옆에 계시며, 또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 옆에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 태어나심과
우리의 어두운 심연을 통해 들어오신 예수.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되새깁니다.
오늘 호스피스에 있는 길순이 씨를 면회하고 오면서
너무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 그늘진 고통 속에 함께 예수님이 계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