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경험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의 거룩함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거룩함 앞에서만 자기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도 신을 벗어야만 했다. 양을 치던 사람이 신을 벗으면 무기력해진다. 양을 돌볼 수가 없다. 포식자들과 싸울 수도 없다. 거친 들판을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포기하고 자기를 완벽하게 낮춰야만 한다. 두 팔꿈치와 두 무릎과 이마, 이렇게 신체 다섯 군데를 땅에 대고 절하는 ‘오체투지’ 영성인 셈이다. 가톨릭교회 사제들도 사제 서품을 받을 때 온몸을 바닥에 던지는 형식을 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서 흙이 된다는 사실을 지금 자기 실존과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흙처럼 살겠다는 뜻이다.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간다. 무(無)에서 유(有)가 되었다가 다시 무로 돌아간다. 흙의 저 아득한 깊이, 무의 현묘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말씀의 핵심이다.
이런 경험을 종교학에서는(Rudolf Otto)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한다. 오토가 『Das Heilige』(성스러움)이라는 책에서 ‘신성한 힘’이나 ‘신성한 존재’를 가리킨다고 언급한 ‘누미노제’(Numinose)는 라틴어 numen에서 파생된 단어다.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번역해도 된다. 이것이 종교 경험의 본질이다. 존재의 경이(驚異)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실제로, 그리고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늘 영혼의 눈이 반짝일 것이다. 생전 처음 바다를 본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종교 동호회 수준에 머물게 된다. 교회 생활이 취미와 교양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나름 착하고 정직하게 살면 그나마 괜찮겠으나 자기들의 세계관을 절대화하면 독선에 떨어지게 되고, 그런 독선적인 신앙생활이 몸에 배면 영혼이 경직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