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부활 경험 이후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의 제자도(弟子道)에서, 즉 ‘제자의 길’에서 찾았다. 당연하다.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 안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생명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영혼을 온전히 기울이듯이 말이다. 교회는 바로 제자도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모임인 셈이다. 우리 글쓰기의 전체 주제와 연관해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제자도가 실현되거나 거기에 가까이 갈 때 교회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거꾸로 제자도가 유명무실해지거나 거기서 멀어진다면 교회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 치고 제자의 길을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주의 종이 되라는 소명에 순종했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그가 제자의 길을 간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처음에는 제자의 길을 가다가도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질 수 있다. 가룟 유다가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다. 누가 제자의 길을 가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나는 그 기준을 정확하게는 모른다. 겉으로 나타난 것만으로 그가 제자의 길을 가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도 어렵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예수의 길을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제자의 길은 끝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지점이 없다. 아무리 목회에 성공을 거둔 목사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교회 안과 밖에서 존경을 한몸에 받는 목사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길을 가야 한다. 오죽했으면 바울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고백했겠는가. 바울은 이어진 구절 14절에도 반복하여 달려간다고 피력했다. 제자의 길이 죽을 때까지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중간에 낙오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수행의 차원에서 살아내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 가지 사연으로 잠시 샛길로 빠졌다가도 제자가 가야 할 본래의 길로 돌아온다. 성령께서 그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눈을 아예 감아버리지 않는 한 누구나 빛의 인도를 받게 된다.
제자는 기본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배움의 자세가 불량한 사람들은
바로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