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400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매우 특이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구도에서 영으로서의 하나님이라면 신부는 교회이기에 성령과 신부는 동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이라는 건 신학적으로 옳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고 신부인 교회가 듣는다고 표현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7절은 예배 의식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성경 말씀이 먼저 선포되고, 이어서 교회 선지자들(설교자들)이 아람어로 ‘마라나타’라고 말하면, 교인들이 그 뜻을 풀어서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하는 예배 의식입니다. 성령의 말씀이 예배 의식에서 선포된다는 의미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번역>으로 1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시오!’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당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교독 형식으로 주고받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성령과 신부(교회)가 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오십시오!’라고 외쳐야 합니다. 목이 마른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목이 마르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들이 목이 마른 지를 절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물은 값없이 받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값없이 숨을 쉬듯이, 값없이 중력을 느끼면서 걷듯이, 값없이 꽃과 나무와 곤충과 하늘과 구름과 비를 보듯이 우리의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값없이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도 값없이 받습니다. 계 7:16-17, 21:6절을 참조하십시오.
지금 이 시대에서는 신부는 교회이기에 성령과 신부는 동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그런데 22장 17절에서는 신부인 교회와 성령께서 하나가 되시어 함께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에서는 교회가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삼일 하나님과 하나 되는 정도까지 성숙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요. 요한일서 3장 2절이 ‘장래에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인 계시가 우주적인 한 부부의 사랑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즉 육체가 되시고 인생을 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과정을 통과하시어 최종적으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시어 창조되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사람, 즉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표현인 교회로 조성된 사람과 연결되시어 결혼하시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 성령과 신부는 결혼하여 생명 안에서 하나 되어 온 우주를 향해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 먹으러 오라고 외치고 있다고 볼 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