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1:24-2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조회 수 13728 추천 수 0 2009.07.11 22:49:31
 

95.6.4. 설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1:24-29


사도바울의 삶은 매우 독특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를 위대한 사도요, 선교사요, 사상가요, 초대 교회 지도자라고 받듭니다만 그 당시에는 별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그 시대가 정확하게 내릴 수 없고 역사가 판단하기는 합니다만 바울은 교회 안과 밖에서 능력만큼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건 이해가 갑니다. 장래가 유망하던 유대교 선생이 어느 날 갑자기 유대교와 경쟁적인 그리도교를 전파한다고 뛰어다니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밉보일만 합니다. 거의 평생 동안 그의 주변에는 유대교 열성주의자들의 위협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가 딱하다는 건 유대교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적대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사도들도 바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 고린도, 갈라디아에도 그와 생각을 달리하는 그리도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바울은 곤혹스럽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성격이 무난하지 못한 탓이거나 아니면 육대교로 부터 그리도교로 개종했다는 약점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거의 평생 동안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런 고난은 정신적이고 사상적이고 신앙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도 많았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아마 테러의 위협을 받거나 린치를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로마법에 의해 태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러번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지금 이 편지도 로마의 감옥에서 에바브로디도로 부터 골로세 교회의 소식을 접한 후에 교회에 침투한 이단사상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는 어려웠습니다. 그는 지금 처럼 어느 교회나 독지가로 부터 충분한 선교비를 제공받지 못하고 스스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자비량’ 선교사였습니다. 경제활동에만 주력해도 힘든 판에 선교사업을 주로 하고 부수적으로, 아르바이트 하는 식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해서 먹고 살았으니 그가 당한 경제적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중해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육체적 한계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그가 당한 고난이 어디 하나 둘이었겠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받은 게 아니라 선교를 위해 당하는 시련과 상처와 고난이었습니다.


1. 바울은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과연 현실성를 갖고 있을까요? 어떻게 보통 인간으로서 괴로움을 기뻐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별로 실감을 갖고 대하지 못합니다. 그런 건 바울 처럼 종교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거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벗어버리려고 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거의 고난과 반대되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현대는 고난이란 말을 기억 조차 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복지가 이루어진 오늘의 시대정신은 오락문화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 사회 어디서나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런 생활이 널려 있습니다. 오늘 저희 교회 소식지의 <비슬칼럼>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만 프로야구의 관중이 작년에 비해 24%가 증가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런 놀이문화에 빠져든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개인 GNP가 1만 달러에 이른다고 여기 저기에 선전하고 있듯이 확실히 우리 사회의 복지수준은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요즘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만한 준비가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이건 어쩌면 당연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생존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즐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메스콤도 이런 놀이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런 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사실은 고생을 덜하고 편안하게 살아보겠다는 이유가 아닌가요? 우리 자식들이 고생하며 사는 걸 좋아할 부모들이 어디 있겠습니가? 이런 생각을 나무란다면 이건 지나치게 인색한 종교일 것입니다. 가능한대로 좀 편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 하여금 금욕주의나 자학적인 삶을 따르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순전히 오락과 재미로만 생각한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인생이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편안한 생활도 역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나치게 오락에 빠져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먼 삶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오락문화, 오락정신이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 속에서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바울의 말을 심각하게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생 그리스도를 위해 몸바쳤던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했을까요?


2. 바울은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찾았습니다. 24 후반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는 고난을 이런 차원에서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만 우리는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고난의 끝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거야 예수님이까 그러실 수 있었겠지.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믿고 그 덕택으로 구원받은 사람들 아닌가!”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계속해서 고난과 상관 없이 살아가려고 합니다. 십자가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인들의 금, 은 십자가 장식으로 목걸이나 귀걸이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자랑거리요, 멋의 상징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여인들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십자가는 오늘 교인들의 신앙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면서 아무도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굶주리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외친 것 처럼 우리가 실제로 고난, 혹은 불이익을 감당할 때만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로 고난을 일절 마다하면서 입으로만 십자가를 의진한다고 한다면 그건 위선이며 속임수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참과 거짓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수 있으며, 그럴 때만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거릴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런 자세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사로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생겨도 그걸 나 자신이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이들은 좀더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있을까?’ 그럴 때만 우리의 봉사는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봉사 중에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 할 일은 모두 챙겨 놓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절대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차원에 까지 이끌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는 게 아니라 그분의 일에 참여하므로써 비록 땅에 묶여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살아가자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세와 태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한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따라올 수는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의 일군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모든 신자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바울 처럼 살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살아가는 걸 더 큰 기쁨으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이런 자세를 가진 바울의 마지막 고백은 이렇습니다.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절). 예수님이 하신 그 일에 자기도 힘을 다해 수고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바로 가장 위대했던 사도인 바울의 됨됨이가 놓여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심정으로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해 수고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늘상 마음에 새기고 있던 바울은 당연히 그를 위해 수고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수고를 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그에게는 불행과 저주일 수 없습니다. 그건 단순하 과정일 뿐입니다. 살아가 인간이 어디 고난을 한 두 가지를 당합니까? 수도 없는 고난인데 그걸 짜증스럽게 생각하다가는 그런 생각 속에서 인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를 다하는 바울이 고난 때문에 두려워 했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바울의 신앙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가요? 얼마나 우리는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힘을 다해 교회청소를 한다면 그게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교우들을 위해 주일 마다 국수를 준비하는 일도 힘을 다해 수고하면 그게 신앙입니다. 간혹 자기 혼자 고생한다며 짜증스러워질 때가 있을텐데 그때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교회의 이모저모에 마음이 쓰이고 자기 자신이 그런 일을 해결하고 책임을 져야겠다고 생각되면 신앙이 많이 자란 것으로 아십시요. 큰 일만이 아니라 아무리 적은 일이라고 힘을 다해 수고한다면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아무리 오묘한 진리를 많이 알아요 수고가 없으며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심정으로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이어야만 교회의 일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기 좋은 때가 왔으니까 세상 사람들 못지 않게 놀아보자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다른 사람 보다 덜 즐기며 산다고 해서 불안해 하지도 마십시요. 우리 삶의 수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오락을 못해서 실패한 인생입니까? 그런 경쟁으로 인생을 살다가는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면 먼저 살아가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가 바로 바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수고한 바울 처럼 살아가십시요.


[레벨:11]질그릇

2009.07.13 14:59:49

목사님!

글 속에서 많이 피곤하신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우리 삶의 수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높여야 하는 것'

많이 어렵지만, 기쁨으로 그 길을 가려합니다.

건강하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9.07.15 23:35:09

박옥진 목사님,

14년전 설교인데, 피곤한 기운이 전달되셨나요? ㅎㅎ

믿음은 기쁨을 열매로 맺는 씨앗이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기쁨의 열매가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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