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27-30

조회 수 6653 추천 수 0 2009.07.11 22:43:26
 

95.5.7. 

좋은 아버지

삼상2:27-30


지난 3월 어느 대학 교수가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해서 나라 전체가 한바탕 떠들썩 했습니다. 작년에도 재산 때문에 친부모를 방화살해 한 패륜범죄가 있었는데, 최고의 지성인이라 할 대학교수가 거의 똑같은 범행을 저질렀으니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어느 사회건 반인륜적 범죄가 없지는 않지만 요즘 처럼 외적인 삶의 환경이 좋은 시대에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생활능력이 없는 부모를 내다 버리는 일이야 아주 흔한 일이고,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93년에는 36명이, 94년에는 41명이 자녀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보다 못해 어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들께 인사를 할 때 “나는 효자입니다”라고 외치게 한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효자가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만은 미루어 짐작컨데 별로 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건 또 하나의 비인간적 교육, 일방적 교육, 지시적 교육, 가부장적 교육에 불과합니다. 인간 자체가 변화하지 않고 몇 가지 효도를 습관화 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부모에게 편지를 쓴다거나 인사를 어떻게 한다거나 선물을 드린다거나 말을 공손히 해야 한다는 등의 문제는 너무도 지엽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효자를 만들 수 있다면야 인간교육이란 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건 효도가 아니라 인간화입니다. 매일 처럼 공부하라고 몰아부치면서 효도하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청소년들을 인간이 되게 하는 그런 사회구조로 바꾸지 않는 한 어떤 효교육도 참된 효자를 만들지 못합니다.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이나 인간화가 우선입니다.

우리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의 심성이 선천적으로 굳어진 게 아니라 대개의 경우 후천적으로 형성되어 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환경에 따라 인격형성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가정교육의 중요성이 점차로 축소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식구들이 매우 밀접한 공동체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고, 아이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가정 이외의 세계가 많습니다. 가정 보다는 학교나 학원이 그들에게 더 큰 세계일지 모릅니다. 따라서 부모의 권위도 약해질대로 약해졌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단순히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보호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바른 가정 교육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해 질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가정의 중요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야말로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잘 이해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난폭하거나 일방적인 아버지의 권위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의 교육에 깊숙히 참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저 돈이나 벌어다 주고 가끔 놀아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인생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그런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런 좋은 아버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녀교육에 실패한 대표적인 구약의 인물을 통해서 <좋은 아버지>가 어떠한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적인 제사장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7,28절의 진술을 통해 보더라도 대대로 뼈대가 있는 가문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가 모세의 형인 아론이나 제사장계열인 레위 가문이었다고 합니다. 엘리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쟁쟁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니까 그 젊은이들의 앞날도 창창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 엘리의 일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제사장의 일을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못된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성서기자는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2;12)고 지적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이며, 스스로 제사장이었던 그들이 불량자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얼마나 불향했을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들의 행실이 2:12 이하에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려고 냄비나 큰 가마 솥 안에 고기를 삶을 때 사환을 시켜서 세살 갈고리로 찔러 걸리는 것을 가져다가 자기들이 먹었습니다. 또는 제사에 쓸 고기의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사환을 시켜서 날고기를 가져오게 하였고, 관리책임자가 삶은 다음에 가져가라고 하면 억지로 빼앗아 왔습니다. 세월이 흐를 수록 이들의 행패는 심해갔지만 어느 누구 하나 이들의 행실을 나무라거나 책망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 기세가 등등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들이 요즘에도 없지 않습니다. 교회 주일학교회에 가장 문제가 많은 아이들은 대개 목사 자녀나 아니면 사찰 자녀, 혹은 장로 자녀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매일 교회 안에서 생활을 하다보니 자기들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갖기 때문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역시 자기들이 실로에 있는 성소의 주인이라는 생각에 자기들 마음 내키는대로 행패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엉덩이에 뿔인 난 못된 송아지로 자라난 이들이 결국에는 회막문에서 시중드는 여인과 동침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 여인들이 먼저 이들을 유혹했는지 아니면 이들 형제가 소위 성폭행을 가했는지 성서기자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동기야 어찌 되었던지 그런 결과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큰 죄악이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게 된 엘리는 아들들을 불러 책망하였습니다. “얘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했는냐? 이 소문이 백성들에게 다 퍼졌다. 이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라.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겠지만,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23-25절). 이미 늙어버린 엘리의 말이 이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먹혀들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일들로 인해 결국 그들을 죽이기로 뜻을 정하였다고 해석하였습니다(25후).

엘리는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만 자녀교육에는 철저하게 실패한 인물입니다. 자기 아내가 홉니와 비느하스를 낳았을 때 아들을 낳았다고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앞으로 자기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라고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몽땅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과는 3,4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전쟁이 나서 하나님의 궤를 끌고 나갔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 한 시에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세 부자가 아주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누가 이런 걸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온 이스라엘의 존경을 받았던 엘리는 결국 아들 교육을 잘못하여 아주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표적인 제사장으로서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자식들이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랬을 것이며,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대로 그는 결국 자식농사에 실패한 셈입니다. 이게 우리 가정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자식들이 항상 바르게만 크든가요? 우리의 기대대로 될 때도 있지만 엘리의 아들들 처럼 전혀 다른게 될 때도 있습니다. 엘리에게는 아버지로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내서 그를 책망한 게 아닐까요?


왜 엘리는 좋은 아버지가 못되었을까요? 왜 그는 자기 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를 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했을까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가 다른 아버지만큼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2:27-30의 말씀은 예언자가 엘리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내용입니다. 잘 보십시요. 이 예언자는 하나님이 엘리 가문을 특별히 사랑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엘리는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우지 못했음을 따지고 있습니다. 29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엘리는 자식들을 너무 버릇 없이 키웠던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하나님의 제물과 예물을 함부로 대하고, 자기의 것으로 취해도 엘리는 자식 귀여운 것만 생각했지 그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 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잘못은 아들들을 하나님 보다 더 중하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물론 제사장이었던 엘리가 하나님 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했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의 잘못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괜찮으려니 했습니다. 앞서 본대로 아들들이 사환들을 시켜서 제사드릴 고기를 먼저 가져다 먹는 일이 많았고, 성소 안에서 폭력을 사용했습니다만 그걸 미리부터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야 귀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고치려고 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망나니가 되었습니다.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량자가 되어버린 홉니와 비느하스를 그렇게 만든 책임은 스스로에게 가장 크겠지만 하나님은 엘리에게 그 책임을 물었습니다. 왜 자식들을 하나님 보다 중히 여겨서 그렇게 버릇 없는 자녀들로 자라게 했는가, 라는 책망입니다.

오늘의 세태도 역시 이렇습니다. 자식들을 하나님 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자신을 곰곰히 돌아보십시요. 우리가 자식들을 더 귀하게 여기는 지 아니면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지 말입니다. 교회 직분을 가진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교회에 나가지 말고 공부하라고 합니다. 이건 아주 심한 경우입니다만 조금 덜 하더라도 학생회 임원을 맡지 못하게 하고 가능한대로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려고 합니다. 간혹 학생들이 교회 일을 한다는 핑개로 공부를 게을리 해서 대학입시에 모두 떨어지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런건 일부이고 사실 공부하는 것은 교회에 나가는 것과 별로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들이 앞장 서서 교회를 멀리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공군 장교로 있는 고동철 군이 우리 교회 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참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대로 학교 공부에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고 좋은 실력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들이 공연히 불안해서 자식들의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자가 엘리를 책망하는 것은 자식들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예물을 빼앗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결과에 불과하고, 더 심원한 이유가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기본적 자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사람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고, 자기 멋대로 살게 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달라는 걸 주지 않으면 협박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중심적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릴 때 부터 부모들이 모든 걸 해결해 주니까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런 게 아주 작은 문제인 것 같지만 이런 데서 부터 모든 사회의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왜 하게 됩니까? 조금만 높은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교만합니까? 다른 많은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다만 어릴 때 부터 그런 가정 환경 가운데서 자란게 그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의 자녀교육은 더욱 어려운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대개가 적은 수의 자녀만 낳고, 핵가족을 이루고 살기 때문에 자녀들을 향한 관심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하나, 혹은 둘의 자녀에게 많은 걸 기대하는 만큼 또 많은 걸 준비해 줍니다. 요사히는 남의 어린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나무라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예컨대 기차나 뻐스를 타고 여행을 하다보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여행하는 젊은 부부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해도 부모들이 내버려두고, 옆 사람이 조용히 시키라고 하면 “뭐, 저런 사람 봤나?”하는 식으로 쳐다보고, 그 아이들 나무라기라고 할 양이면 “왜 남의 아이 기를 죽이냐?”고 따지기도 한답니다. 아이 문제가 커져서 어른 싸움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이런 상태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가 잘했던지 못했던지 자기 부모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신경 하게 되고, 누가 우리 편인가 하는 문제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많은 집에서 아이들이 왕입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거야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아이들을 집에서 왕 처럼 키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맛있는 게 있어도 아이들이 모두 자기 입으로만 들어가고, 텔레비젼 방송도 자기 마음대로 보고, 청소도 안시키고, 그저 공부만 잘하라고 왕자 처럼, 공주 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No’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건 아무리 졸라도 안되는 줄 알아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왜 그렇게 불량배가 된 줄 아십니까? 엘리가 그 아이들에게 ‘No’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사예물을 빼앗아 먹어도 좋다, 행패를 부려도 좋다, 그냥 좋다, 좋다만 했습니다. 다 늙은 다음에, 아들들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한 소문을 듣고, ‘얘들아, 그런 일을 하지 말아라. 소문이 좋지 않다.’고 말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이렇게 준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2:30후). 영국의 슈트워트 홀든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예를 돌린다는 것은 반드시 그를 위하여 큰 일들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선택을 그의 판단에 맡기고 모든 가치를 그의 척도에 의하여 측정하고 생의 모든 순간을 그의 이름의 영화로움에 공헌하도록 애쓰는, 철저하게 키워 온 마음의 자세이다.” 그렇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키웁니다. 가정의 달에 우리는 어떤 아버지인가, 어떤 어머니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엘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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