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3:31-35, 무엇이 가정의 위기인가?

조회 수 7895 추천 수 0 2009.07.11 22:46:36
 

1995.5.21. 설교

무엇이 가정의 위기인가?

막3:31-35 


최근에 우리는 가정의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옛날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이 화목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최근의 가정 파괴의 현상은 예삿 일이 아닙니다. 94년의 경우 존속살해 사건이 9일만에 1건, 자식의 부모폭력 사건이 하루에 3.2건, 자식들을 내다 버리는 일이 하루에 9명 꼴이라는 통계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드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들을 때 마다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다. 왜 요즘 가정의 기초가 허물어지는 일들이 많이 발생할까요? 극한적인 상황 가운데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기본적 윤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옛날에도 너무 가난하면 자기 딸을 부자집 늙은 사람에게 첩으로 보내기도 하고, 머슴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쩔 수 없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문제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허물어 집니다. 모시기 귀찮다고 늙은 부모들을 내다 버리는 일도 많습니다. 돈 때문에 서로 형제들 끼리 의가 상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심지어는 칼부림 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날 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했을 때 보다 훨씬 가정의 위기는 심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핵가족 시대이기 때문인가요?

이에 대한 답변은 이미 허물어져 버린 전통 윤리를 대체할 만한 윤리의식이 우리에게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옛날에는 삼강오륜을 금과옥조 처럼 여기고 살았고, 아무도 그런 윤리기준을 거스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절대적인 효로 대해야 했습니다. 웬만한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 3년 상을 지냈습니다. 심지어는 무덤 엽에 초막을 지어놓고 3년 동안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고 합니다. 임금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 남편의 권위가 바로 사회의 질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권위는 절대 도전받지 않았습니다. 신하와 자식과 아내는 임금과 아버지와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그런 윤리가 더 이상 우리 사회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봉건사회에서나 가능했던 윤리이기 때문에 지금 처럼 후기 산업사회 속에서는 아무런 설득력이나 타당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윤리규범과 윤리의식이 그 자리을 메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권위와 효의 윤리가 아니라 무슨 윤리가 들어와 있습니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입니다만 전통의 정신이 밀려난 우리의 머리와 가슴이 그대로 비어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무슨 관계인지, 스승과 제자는 무슨 관계인지, 남편과 아내는, 기업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 기준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있다면 다만 경제적 논리 뿐입니다. 서로 자기가 경제적 이익을 독차지 하겠다는 탐욕 뿐이지 모든 정상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윤리의식이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가정의 위기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위기가 놓여 있는게 아니가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는 막3:31-35 말씀을 통해서 참된 가족관계는 무언지, 따라서 잘못된 가족관계는 무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0절 부터 연결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제자들을 임명하시는 등 하나님의 일을 열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잠시 쉬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드는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나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미쳤다는 해괴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문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곧 이어 이제는 예수님의 식구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남녀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사람을 넣어 예수님을 불러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예수님의 가족들도 그런 소문을 듣고 염려가 되어 찾아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족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33절)고 반문하시면서, 둘러 앉은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메요 모친이니라.”(34,3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가정의 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참된 가족관계는 무엇인지 그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가족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친척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실 때 아버지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등장할 때 어디에도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없는 걸 보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남이 본인이 목수 일을 하면 가족을 먹여살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탓에 서른 살이 되었을 때도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니다만. 여하튼 예수님은 서른 살 까지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가족을 부야할 책임을 갖고 있었을 것이고, 동생들도 어느 정도 성장했을 서른 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집을 나오셨을 것입니다. 이런 가정 환경 가운데서 자라고 생활한 예수님이 가족에 대해 갖는 애정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특히 서른 살에 이르기 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집을 떠난 큰 아들 예수님 때문에 마음 걱정이 클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면 예수님은 항상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그 밑에서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앞으로 요한이 대신 아들 노릇을 하게 될터이니까 그를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지극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어머니와 사랑스런 동생들이 찾아왔는데 얼른 뛰너나가든지, 바쁘면 잠시 기다리라고 해야 할텐데 예수님은 약간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33절).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쩌면 20절 이하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내심 그를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자기를 귀신들렸다고 불들어 나온 친척들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심란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렇게 호되게 질책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28,29절). 이런 상태에서 가족들이 다시 찾으러 왔으니 반갑게 뛰어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가족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리쳐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혈육이 섞였다는 점에서 가족을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저 사람들이 내 가족이 아니라 여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자신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차원에서 가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에 바로 이 인간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바른 길이 놓여 있습니다.

2. 우리는 지나치게 가족을 혈육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물론 같은 핏줄을 갖고 태어났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우며 감사한 일입니까?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야말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친구가 좋다고 하더라도 정말 어려울 때는 형제와 가족이 제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핏줄의식이 우리에게 지나치게 강하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식만 자기 눈에 들어오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식을 위한 거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남을 위해서라면 아주 인색한 게 우리의 정서이며 생활현실입니다. 아들 선호 사상이 어디에 연유합니까? 대를 잇는다, 핏줄을 잇는다는 데 있는 겁니다. 외국 사람들은 입양을 많이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핏줄의식입니다.

우리 나라 만큼 가족간의 연대의식이 강한 민족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가족 끼리는 아주 단단하게 뭉쳐 있습니다. 오늘 가정의 위기는 가족관계가 느슨해 진다는 데 있는게 아니라 여전히 지나치게 탄탄하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가족이기주의>라고 불러야 합니다. 자기 자식만은 공부를 잘해야 하고, 잘나야 하고, 모든 게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우리는 도에 넘칠 정도로 핏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자기를 찾아온 가족들을 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이냐? 그는 우리에게 가족관계의 근본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건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합니다. 개들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가족의 본질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질 때만 우리는 가족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사회정의, 공동의 덕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가족들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는 시어머니와 며니리와는 거리를 두고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해야죠. 그러나 그런 혈육관계에 묶여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가족에 대한 새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를 우선 인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아니라 한 남자, 한 여자, 한 인간으로 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남편을 바라보고 부모를 바라보고 자식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의 한계도 이해하게 되고 그럴 때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부자지간이니가, 모녀간이니가, 부부간이니까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것에 매달려 버린다면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이런 가족들이 모인 사회는 불의하게 되고 인정과 사정이 사회정의를 파괴해 버리고 맙니다.

서울 대학교 종교학과 정진홍 교수는 계간지 <녹색평론> 94년11-12월호에서 ‘도덕성 회복의 윤리’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의 분석을 이렇습니다. 가정윤리가 땅에 떨어진 지금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과거의 <효사상>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공무원들에게 부모 생일에 휴가를 주어 부모를 효도케 한다거나 중고등 학생들에게 “나는 효잡니다.”라는 구호로 인사를 하게 한다고 해서 도덕성이 회복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건 모두 피상적이고 임시방편적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근본적인 것을 질문하고 거기서 새로운 대답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정교수는 자기 제자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효를 혈육의 당연성에 근거해 강요하는 것에 대해 무섭게 저항하면서 아버지와 불편하게 지냈는데, 어느 순간에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한 남자로 이해하게 되면서 아버지를 자기 삶 속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위기가 무엇인지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족을 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가족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아들과 딸이니까 잘 하든 못 하든 귀여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함께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로서 사랑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만 이 사회는 그 건강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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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2016.02.17 02:08:46

가정의 윤리를 가족관계의 본질로 보셨군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한 인간으로 보니까.. 화가 안나고 이해가 되는쪽으로 가는건 맞는데..

한가지 질문 드려도 될까요?

성서에 기독교 윤리가 나와 있는지요?

예를 들면, 성윤리나 사회윤리 등의 문제에 관해 성서의 가르침이 있는가?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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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02.17 22:09:04

신약성경에 기독교 윤리가 수두록 하게 나옵니다.

바울은 교리를 말한 뒤에

반드시 기독교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 삶이 윤리인 거지요.

그것이 오늘에도 그대로 문자적으로

적용되는지는 또 따져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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