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8:10-22, 야곱의 하나님 경험

조회 수 10068 추천 수 1 2009.07.11 22:47:48
 

1995.5.28. 설교

야곱의 하나님 경험

창28:10-22 


구약의 야곱이란 인물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출생시에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온 걸 보면 성서기자가 야곱의 특이성을 처음 부터 확실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비록 자기의 운명을 매우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간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생을 잘 풀어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탁월한 처세술, 강한 의지력과 추진력, 운명을 극복코자 한 처절한 몸부림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그 이스라엘이란 이름에서 자기 민족의 이름이 나온 걸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곱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민족적 영웅이며 모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험난한 역사는 곧 야곱의 일생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야곱은 동일시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허점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부터 어머니 리브가의 치마폭에 휩싸여 자란, 요사히 말로 하면 전형적인 ‘마마보이’ 형이었고, 성장하면서 모사와 술수에 머리를 잘 쓰던 그였습니다. 별로 민족적 영웅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음데도 불구하고 성서의 핵심적 인물로 부각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인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부모와 가족이 있는 팔레스틴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20여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와서 형 에서와 화해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20년 동안 하란에서 재산을 많이 모았지만 실제로는 기구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하란으로 떠날 때와 돌아올 때 두 번에 걸쳐서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떠날 때 어느 광야에서 노숙하는 중에 꿈 속에서 천사들의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돌아올 때는 얍복강 나룻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환골뼈가 부서질 정도로 천사와 씨름하였으며, 결국 하나님으로 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거나 신실하지 않았지만, 특히 하란으로 야반도주 할 정도로 야비하고 비굴했지만, 놀라운 하나님 경험을 두번 씩이나 하므로써 그런 상처들을 씻고 신앙의 영웅답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야곱 처럼 살아갈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 경험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때만 우리는 인생살이 속에서 얻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자초지정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야곱과 에서의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많이 들어 얼마 있지 않으면 죽어야 할 것을 깨닫고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서 큰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려고 그 예식을 준비시켰습니다. 에서는 원래 사냥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아버지 에서가 산짐승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축복예식의 고기장만을 위해 사냥을 떠났습니다. 그 사이에 어머니 리브가는 양을 잡아 그럴듯하게 음식상을 차린 다음에 야곱을 에서 처럼 분장시켜 이삭 앞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이삭은 너무 늙어서 시력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에서로 분장하고 들어와 앉아 있는 야곱을 알아채지 못하고 장자의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뒤 늦게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음식상을 마련하여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 앞에 나갔습니다. 그제서야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는 야곱이 자기들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에서는 기회가 닿기만 하면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벼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눈치 챈 어머니 리브가는 사랑하는 야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오빠 라반에게 보냈습니다. 야곱은 부모님 곁을 떠나기 싫었지만 에서의 성격을 아는지라 아무도 모르게 줄행랑을 치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터 어머니 곁에서 가정 일을 도우며 곱게 자란 야곱이었기 때문에 머나먼 곳으로 기약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게 죽기 보다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물을 채운 가죽부대와 얼마 간의 양식, 그리고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금부치 몇개를 들고 아주 먼 길을 떠났습니다. 집을 떠난 첫날 밤을 맞은 야곱은 난생 처음으로 광야에서 혼자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의 따뜻한 잠자리에 맛난 음식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금방이라도 짐승이 들이덥칠 지도, 혹은 나그네를 터는 강도가 나타날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혼자였습니다. 항상 곁에서 돌봐 주시던 어머니도 없었습니다. 공연히 형과 아버지를 속였다는 자책감과 후회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잠자리에 든 야곱은 꿈 속에서 천사들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 경험을 삶의 위기 가운데서 가능했다. 철저한 고독, 철저한 좌절, 철저한 무력감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한 것입니다. 야곱이 그냥 팔레스틴 자기 집에서 부모 곁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불편도 모르고, 외로움도 모르던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광야로 쫓겨나온 그의 신세라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릅니다. 야곱 처럼 인간은 철저하게 인간적 안전장치로 부터 벗어 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 나라 전제 기독교인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의 하나가 위기의식의 감소와 상대적으로 안정감의 확장입니다. 70,80년 대는 정치적, 경제적 불안감이 우리 사회 전체를 휩싸고 있었는데, 90년 대는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냉전의 종식, 그리고 경제적 성취로 인하여 국민들이 나름대로의 안정감이 특징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직도 서구라파와 비교하며 생활지표가 낮은 수준이지만 세계화라는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아시아 권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생활조건이 눈에 띄게 놓아졌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의 노동자들이 한국을 천국으로 알고 찾아옵니다. 꿈에 그리던 자기 집과 자기 차를 갖게 되었고, 웬만한 가전제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수의 백성들이 최저생활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긴 하지만,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80%에 이른다는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자기 생활 수준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게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 교회의 신자들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보험에 들듯이 약간의 투자를 통해서 죽음 다음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천당에 가겠다는 생각, 혹은 기독교의 서양적 종교문화가 매우 세련되었다고 보고 자신도 그런 축에 끼이려고 하는 생각으로 교회에 나갑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참된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이나 가난 속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외적인 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긴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진정한 위기란 정신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목표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이 우리를 하나님 경험으로 이끕니다. 전쟁과 가난과 질병은 그런 정신적, 영적 위기를 깨닫게 하는 동기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야곱의 경우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광야에서 혼자 어떤 처지에 놓였었는지 잘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 어머니의 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고향의 따뜻한 잠자리가 영원히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억지로 빼앗은 장자명분과 축복도 역시 자기를 영원히 안전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언젠가는 혼자가 된다는 사실을 보다 빨리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들에게는 하나님 보다 부모의 힘이 더욱 절실합니다. 이런 면에서 어린 아이들에게는 하나님 경험이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절대적 힘이며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바울 처럼 이 세상의 자랑거리를 배설물 처럼 여길 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이 세상의 취미생활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자기 성취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야곱 처럼 그런 것이 자기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우리는 그제서야 놀라운 하나님의 힘을 느끼게 되고 그 힘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경험입니다.

2. 이 광야에서 혼자 노숙하던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은 한 가지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28:15).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히브리어는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믿음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롭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습니다. 숙명적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를 높이 드러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번 6월 말에 있을 지방자치 선거에 많은 인물들이 입후보 할 예정입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지방민들을 위해서 희생적인 자세로 일하겠다는 꿈을 피력하겠지만 결국은 자기 이름을 내려는 목적으로 나선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으면 외롭기 때문에 그 해결책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런 외로움을 피해보려고 친구들을 만나고, 취미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그런 것은 잠시 우리로 하여금 외로움을 잊게 할 뿐이지 근본적으로 벗어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외롭지 않은 듯이 살아갈 뿐만이 아니라 참된 길도 찾지 않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외로움의 극복은 다른 데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만 인간은 외롭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외롭지 않을 때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혼자 잠자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신 말씀은 절실하게 외로움을 그림자 처럼 달고 사는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좀더 절실하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걸 인간적 경험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참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냥 함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고아들은 아무리 호화호식을 한다 하더라도 불안할 수 밖에 없고, 따뜻한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자신만만 하고 편안한 것 처럼 말입니다. 사람들도 그럴진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다르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살이지만 의연하게 버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형편에 놓여 있습니까? 아직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편안한 것만 찾고 있는 야곱인가요, 아니면 그런 안전장치가 별것 아님을 알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인가요? 이런 야곱의 하나님 경험 없이 우리는 아무 능력도 없이 살게 됩니다. 비어 있는 마음을 채우려고 무진장으로 애를 쓰지만 그럴 수록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혼자이고, 여전히 버려진 자 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와 함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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