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12-16, 구도자적인 삶의 길

조회 수 10660 추천 수 0 2009.07.31 21:49:46
 

1996.1.14. 설교

구도자적인 삶의 길

빌3:12-16


지난 1992년 여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감격스러워 했던 장면은 강원도 어느 작은 어촌 출신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시합에서 첫번 째로 테이프를 끊는 순간이었습니다. 올림픽에서 수여되는 수 백개의 금메달이 있습니다만 마라톤의 금메달이 가장 값지다는 건 누구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황영조 선수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도 역시 금메달을 땄습니다. 키고 작고 별로 세련되 보이지 않는 황영조, 촌놈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황영조는 그 누구 보다도 대한민국을 세계에 가장 멋지게 알린 인물이 됐습니다. 한국의 영웅 황영조는 금년 미국 아트란타에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하여 마라톤 올림픽 연2회 우승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맹훈련 중에 있습니다. 다른 운동도 역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엄청난 훈련을 거치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만, 특히 42.195km를 2시간 10분 내에 달려야 하는 마라톤은 그야말로 자기와의 극한적 투쟁입니다. 마라톤은 자기 체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운동입니다. 100리 이상의 구간 중에서 어느 순간에 이르면 거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됩니다. 실제로 백여리를 두 시간에 걸쳐서 달리는 도중에 대개의 선수들은 몇 번이나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 두어야겠다는 충동을 억제하고 끝 까지 최선으로 달리는 것 자체도 힘들거니와 다른 사람 보다 좋은 성적을 낸다는 건 더욱 힘든 일입니다. 다른 운동에 비해 마라톤은 훨씬 인간의 정신력을 요구하게 됩니다. 두 시간 여 동안 계속적으로 달리기를 거부하는 자기의 욕구와 투쟁해야만 합니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이 고통이 훨씬 지속적이라는 데 어려움이 더합니다. 100m 달리기야 10초 정도만 참고 달리면 이기든지, 지든지 판가름이 납니다만, 마라톤은 자그만치 두 시간 동안이나 자기 혼자 그 고통과 고독을 이겨내야 합니다. 아마 <My Way>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은 라스트 씬에서 주인공이 넘어졌다가 일어서고, 다시 엉금거리며 기기도 하면서 결국 완주하는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라톤은 일종의 인생의 과정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집중하는 운동입니다. 이런 모습은 흡사 외딴 산의 굴속이나 암자에서 수년, 혹은 수십년 씩 도를 깨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들의 진지성, 치열성은 너무나 안일하고 구태의연하고 충동적인 우리의 삶을 꾸짖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런 궁극적 목표를 향한 전력투구라는 사실을 좀더 절실하게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은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를 신뢰하고 산다는 건데, 과연 우리가 순간적인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인생 7,80년을 전체로 바라보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반성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자기 인생을 전체 과정으로 생각하고 보다 궁극적인 문제에 모든 걸 집중해 가는 삶이 바로 求道입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구도입니다. 도를 얻으려고, 그 도에 이르려고 모든 걸 경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오늘 우리는 바울의 말씀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그것을 얻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잡으셨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아직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새번역, 빌3:12-14)

본문 말씀 중에서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요.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향하여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합니까?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는 달리기 하는 이들의 그것과 같습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골인 지점만을 향해서 온 몸을 기울인 자세로 달려가는 것 처럼 바울은 자기 인생을 그렇게 기울여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한 집중력이 바로 구도자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자기의 삶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마라톤 이야기를 해 봅시다. 마라톤 선수가 10km 쯤 달려왔을 때 힘이 들다고 해서 자기 집의 편안한 소파에 눕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가, 하고 언잖게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선수는 얼마 가지 못해서 기권하고 말 것입니다. 훌륭한 선수는 물론 체력이나 달리는 기술이 좋아야 합니다만 못지 않게 정신력이 탁월해야만 합니다. 그 정신력은 바로 집중력입니다. 자기가 달려야 할 40여 km만을 생각하고, 그 과정의 일들을 모두 종착점에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그 목표를 향해서 온 몸을 기울여 달려갈 수 있는 그런 집중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인생의 종착점인 죽음의 순간을 향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이런 집중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너무나 자질구레한 일들에 우리의 모든 마음과 정신을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에 어떤 절대적인 대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걸어가야 할 길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일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삼류 마라톤 선수 처럼 그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어느 중간에서 퍼져버리고 맙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자기의 인생을 끝내고 말 것입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콜라나 마시면서 앞서 달려가는 선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삼류 마라토너 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우리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구도자적인 삶에서 중요한 건 그에게 道가 있는가, 그 목표가 분명한가, 모든 걸 다 바칠만한 목표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일단 목표가 분명해야 그 길을 열심히 갈 수 있습니다. 마라토너가 골인 지점을 모르고 있다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바울이 달려갈 그 목표는 3장1절 이하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으로 부터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구원의 세계며, 부활의 세계며, 능력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이루어진 그런 구원의 모습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줄여서 한다면 <믿음을 통한 칭의>입니다. 이런 목표를 향해서 바울은 줄달음 쳤다고 고백합니다. 이미 완전해 진 것도 아니고, 이미 이룬 것도 아니지만 다만 그걸 향해 달려갈 뿐이라는 말씁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비추어 설명하자면 도를 이루려는 절박한 투쟁입니다. 그가 모든 개인적인 성취나 욕망, 혹은 세상적인 명예심과 재물을 배설물 처럼 버리고 예수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다른 게 아니라 이 목표가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의 던져 버릴 수 있을만한 그런 삶의 최종적 목표가 그에게는 확실했습니다.

신앙은 우리 삶의 주변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예컨대 냉장고나 VTR이나 캄퓨터, 취미생활 같은 그런 생활용품 내지 사치품목이 아니라 그게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필수품, 굳이 말하자면 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우리의 모든 삶을 던져서 얻어야 할 최종적인 세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고 그저 정신적인 위안이나 얻자, 도덕심이나 키우자, 심지어 복이나 받자고 생각한다면 신앙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요.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에 나왔다, 나오지 않았다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보다 근본적인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다 포기하면서도 하나님으로 부터의 의를 얻으려고 하겠는가, 말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무얼까요? 딸(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할까요? 어떤 딸들은 자기 방에 있는 책이나 인형, 악세사리, 오디오 같은 것들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아버지야 당연히 아버지로서 거기 있는 분이라고 전제해 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딸은 그런 주변 사물들 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친구들 처럼 요즘 탤런트나 가수들의 신상을 알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로 부터 좋은 딸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책을 일부러 보기도 하고, 아버지의 취미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아버지와 좋은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생활 주변의 일들 때문에 그런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아버지란 단순히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만 조달해 주는 분, 돈이나 벌어다 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딸 처럼 우리는 하나님 자체에 대한 관심을 하나도 없고 그 외의 것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씀을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 너머에 계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철이 덜든 딸 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는 모든 세상살이의 노력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끊임 없이 다투고 방향 없이 기우뚱 거릴 뿐입니다. 점점 풍요로워지는 오늘의 시대지만 사실은 더욱 삶을 힘들어 하고, 지치게 되며, 따라서 거칠게 되고, 즉흥적으로 될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문화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TV 코메디나 쇼 프로와 한국 영화인 것 같습니다. 제 딸들이 보고 재미있어 하는데, 무조건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난감합니다. 딸들 옆에 앉아서 잠시 들여다 볼 때가 있는데, 한결 같이 비정상적인 웃음을 짜내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겨우 중학교 학생들이 소풍 가서 자기들 끼리 웃음거리를 만들어낼 정도의 소재를 상업방송이나 공영방송을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내보낸다는 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이들이 이런 프로를 보지 않고 자랄 수록 훨씬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바르게 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부분만이 아니라 문학도 역시 그렇습니다. 금년이 문학의 해라고 해서 여러 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소설다운 소설, 시다운 시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학작품들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개는 베스트셀라를 만들기 위해 포장만 그럴듯하게 했지 실상은 문학성이 따르지 못합니다. 이미 일본의 여러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6.25라는 민족적 상처를 경험한 우리는 아직 요원한 실정입니다. TV 프로나 영화나 문학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한결 같이 값싼 상업성에 몰두 하고 있다는 게 바른 지적 같습니다.

이러한 문화의 미숙성, 즉흥성, 오락성은 근본적으로 삶을 道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갖지 못한 민족은 결코 삶의 깊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저 말장난 같은 오락에 빠질 뿐이지 죽음과 평화와 정의, 종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정신세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다시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땅 위에서 오직 한번 뿐인데, 겨우 오락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절실하게 살아가야 할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백 여리를 달려가는 마라토너 처럼 하나님 안에서의 의를 얻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구도자 처럼 하나님의 세계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절실하게 살아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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