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11. 설교 

그리스도인에게 놓인 삶의 기초

<롬6:15-23>


바울이 살고 있던 로마 시대는 여러 면에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0세기 후반과 비슷합니다. 우선 풍요가 그 특징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늘은 산업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생활이 아주 편리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낙네들이 겨울철에 현풍천에 나가 얼음을 깨고 그 밑을 흐르는 물에 빨래하던 모습을 기억하겠습니다만, 이제는 모든 가정에 자동 세탁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적당한 양의 빨래를 집어넣고 버튼만 누르면 탈수 까지 마친 빨래가 나옵니다. 옛날에는 명철 때나 소고기국을 먹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먹기 싫어서 그렇지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풍요로워졌다는 걸 가리키고 있습니다. 로마시대도 역시 그렇습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획득한 재물과 노예로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노예들이 모든 노동력을 감당하고 로마 시민들은 그저 먹고 즐기는 일에 마음을 썼습니다. 또 하나의 비슷한 점은 매우 부도덕하다는 사실입니다. 풍요가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매우 부도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찰의 힘으로 겨우 치안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곳곳에 증오심과 파괴적 세력이 자리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에 스스로 존재할 능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약이나 그와 유사한 것에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폭력과 살인, 강간 등 우리는 그 어떤 대책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악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로마도 역시 그랬습니다. 단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원치 않는 아기, 특히 여아가 태어날 경우에 자주 내버려졌습니다. 그렇게 광장에 버려진 그 아이들을 매음굴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데려다가 키워서 창녀로 만들었습니다. 순교자 져스틴은 말하기를 로마의 부도덕성 속에서 전체 도시가 매음굴화 되었다고 하면서, 사창가를 찾는 많은 로마인들이 자기가 내어다 버린 자기 자녀들과 동침하게 되는 일 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무감각하고 부도덕한 로마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게 살면서도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당연한듯이 살아가는 로마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런 유혹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유대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된 사람들로서 어떤 죄를 지어도 염려 없다. 영적으로만 깨끗하면 육체적으로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바울의 충고가 15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런 갈등이 2천년이 지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역시 똑같이 적용됩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는 가장 큰 문제는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부도덕하다기 보다는 신앙적인 노력에 비해 삶의 실천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 불균형이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명제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못하고 매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부도덕성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기만 하다면 아마 이 사회는 혁명이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살이를 믿음의 원칙에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의 시류에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얻은 세상의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세상이 변하는대로 따라가기에 급급할 뿐이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습니다. 이방의 세계에 살면서 그들의 세상살이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면서 부도덕한 생활에 젖어드는 그런 문제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소하던 바울의 외침을 들어야만 합니다. 비록 2천년의 간격을 갖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7,18절 말씀에서 <죄의 종>과 <의의 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종>이 뜻하는 바를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 류의 노예 제도가 더 이상 이땅에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매우 엄격하게 시행되던 로마의 노예제도는 노예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노예는 집이나 땅이나 소, 말 처럼 그 주인의 소유물에 속할 뿐입니다. 주인이 어떤 조치를 가해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의 이런 노예제도를 염두에 두고 죄의 종과 의의 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왜 이방인의 삶을 가리켜 죄의 종이라고 할까요?

바울이 본 로마는 거대한 죄의 제국이었습니다. 로마는 헬라제국을 무너뜨리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시내반도 및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막강한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곳곳에 총독을 파견하여 총독정치를 펼쳤습니다. 한 제국의 유지는 그런 정치, 군사적 조치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정신적 연대감의 일치가 더욱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로마는 로마만이 아니라 식민지 지역 마다 헬라인의 생각과 유사한 그들의 가치관, 생활양식을 심었습니다. 그건 바로 육체의 즐거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헬라 사상도 역시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면서 쾌락주의적 경향을 부추겼는데, 로마가 이를 이어 받았습니다. 모든 제국 신민들이 로마의 통치에 항거만 하지 않는다면 어떤 육체적 부도덕성도 용납되었습니다. 로마는 오히려 정치적 고려 때문에 쾌락주의를 확산시켰습니다. 이는 흡사 우리의 군사 독재시절에 성에 관련된 산업이 번창한 것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롬6:12,13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별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처음에 예로 들었듯이 로마사회는 먹고 마시고 성적 쾌락을 즐기는 일에 모든 걸 투자했기 때문에 결국 뜻하지 않게 자기 자식과의 동침이라는 사건도 발생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이는 곧 몸의 사욕에 따르는 일이며,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런 삶의 특징은 탐욕입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능력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탐욕이 그들의 심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죄의 종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쳤다거나 살인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파렴치한 행위만이 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탐욕적인 삶의 경향성이 바로 죄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이를 우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만 않았다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로마서에 의하면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 해도 부도덕한 일에 자기 몸을 내어 주었다면 그게 바로 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이라 하더라도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면 그게 죄의 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로마 시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육, 정치, 경제, 예술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만 로마 시대 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탐욕의 질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먼저 이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 숨어있는 죄의 모습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호화로운 모습들이 온통 죄의 종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저는 두 가지 만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한 가지는 매년 전국민이 홍역 앓듯하는 대학입시입니다.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기구입니다. 그곳에 들어간다는 건 진리대로 살기 위해 훈련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대학 입시에 따른 인간의 탐욕을 보게 됩니다. 입시생을 둔 가정 마다 모든 식구가 좌불안석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다른 사람 보다 좋은 대학에 무조건 들여보내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우리의 입시현상을 보면서 이건 사람을 살리는 제도가 아니라 파괴하는 제도, 인간의 욕심을 키우는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위 말하는 패션쇼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젠 몇몇 세계적 패선 디자이너가 배출된 모양입니다. 우리는 그걸 예술이라고 생각하여 관람하기도 하고 출품된 옷을 비싼 돈으로 사 입기도 합니다. 팬션 쇼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입니다만, 지나치리 만큼 옷에 마음을 뺏기고 살아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누가 더 첨단 유행에 맞는 옷을 입는가, 누가 더 비싼 옷을 입는가, 이런 옷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고, 또 많은 돈도 투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시대도 그런 일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듯이 말입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말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것들은 육체의 사욕을 따라 행하는 일들입니다. 물론 옷을 단정하게, 가능한대로 아름답게 입으려는 노력 자체를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요즘의 이 시대가 그런데 지나치도록 마음을 쏟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인생을 남이 얼마나 예쁘게 보아주는가, 어떻게 화려하게 보일까 하는 것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런 경향성 가운데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종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풍요의 도시, 소비의 도시, 쾌락의 도시, 패션 쇼의 도시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이방인의 풍속에 아무런 생각 없이, 혹은 은혜 가운데 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도 아무 상관 없다고 자기를 합리화 하면서 살아가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쳤다, 그렇지 않다의 차원이 아니라 로마시대가 요구하던 육체의 탐욕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죄였다는 말씀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자기의 육체적 즐거움만을 위해 과소비 한다면 그건 바로 죄의 종이 되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절제의 생활을 몸에 젖어들게 해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의의 종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18절에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또한 22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절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오해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아도, 성찬예식에 참여해도 여전히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죄와 무관할 수 있다는 건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두번째의 오해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무 상관 없다는 주장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죄는 그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강조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얼까요? 왜 우리는 죄로 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의의 종>이라는 말씀에 주의하십시요. 참된 그리스도인은 의의 종입니다. 의(義)에 의존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죄로 부터 해방됐습니다. 의에 의존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의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옳은 것이 무언가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결단하며 사는 걸 뜻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은 의가 아니라 탐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옳은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모든 걸 돈벌이와 연결시키지만 우리는 의로움과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만 우리는 죄로 부터 해방받은 사람이며 의의 종입니다.

며칠 전 미군 소령 한 분이 TV에 소개됐습니다. 이미 2남1녀를 둔 가정이지만 우연히 만나게 된 한국인 장애소녀를 입양해서 키우다가 좀더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 진급의 기회도 포기하고 미국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경제적 이유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의로움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의의 종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만약 우리를 포함해서 인간이 모두 그렇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아주 많은 고통과 슬픔이 이 땅위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걸 바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요. 의를 기준으로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의가 궁극적인 삶의 기초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위에서 약하디 약한 육체와 정신을 갖고 살면서 완벽한 의를 실행하지는 못해도, 그걸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로 부터 해방받은 사람들이며, 의의 종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성령이 우리를 도와 진정으로 의에 속한 자들로 성숙해 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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