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4.23. 설교
누구의 죄냐?
요9:1-7
지난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TV 방속국도 이 날 장애인을 위한, 혹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특집을 꾸며 내보냈습니다. 그중에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할 정도로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발 한쪽만 남은 여자분, 국민학교 1학년의 몸집에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한 사람, 뇌성마비 된 사람들,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들, 청각이나 시각 장애자들의 사는 모습이 필름에 담겨졌습니다. 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런 이들의 거북스런 생활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이 그렇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장애인들이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복지의 목표라고 했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스스로 말한대로 그런 의지를 분명히 갖고 있기만 하다면 이 나라는 정말 살맛 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정은 영 딴판입니다. 말이야 누가 못합니까? 대통령은 우리의 개인 GNP가 1만 달러에 가까워 오고 있으며, 세계 10대 선진국 대열에 끼일 날이 멀지 않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처럼 장애인들이 불편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우리 정도의 경제수준의 국가들 중에 우리 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많이 배워야 하고, 업적을 많이 올릴 수 있는 사람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장애인 복지 운운 한다는 것은 정말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지난 달 8일 밤 서울에서 한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씨가 분신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도 거리에 죄판을 벌여놓고 가케트 테이프를 팔고 있었습니다. 단속반원에게 스피커 배터리를 빼앗겼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배터리를 찾으러 구청 당직실을 찾아갔습니다만 누구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돌려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였으며, 13일 만인 3월21일에 결국 죽었습니다. 인간은 살 길이 막막하다고 여겨졌을 때, 그리고 자신의 인간다움이 철저하게 상실되었다고 여겨졌을 때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그까짓 배터리 하나 때문에 죽기 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에게는 몇 만원 짜리 배터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삶의 터전을 아주 쉽게 빼앗겨 버린 인간상실감이 문제였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물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것 처럼 외치고 있는 우리 나라의 자화상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장애인의 날>을 만들어 행사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행사를 통해 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그리고 정상인들에게 장애인을 향한 관심을 고취시키겠다는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날 하루만의 형식적인 행사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까요? 그래도 하지 않는 것 보다야 낫지 않느냐, 하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장애인 문제는 행사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삶, 우리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장애인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정치적 인기를 위해서, 혹은 자기 회사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참여한다고 한다면 그건 오히려 없는 것만 못합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의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어느 재벌 기업에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좋은 일은 다 맡아서 하는 것 처럼 선전을 대대적으로 해대면서, 법이 강제하고 있는 <장애인 고용법>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너희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도와줄 뿐이지 같은 공동체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거의 우리 나라의 정치와 경제인들의 생각이 이런 데서 한 발자국도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참 안따까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장애인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주변에 많이 모였습니다. 중풍병자나 시각장애자, 팔이나 발을 못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기도 했고, 예수님이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선천적으로 소경인 사람들 만나셨습니다. 일부러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경은 그의 신상에 대해 별로 이렇다 할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만 아주 형편 없는 생활조건 속에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마 그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동냥을 얻어 호구지책을 삼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소경의 몸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리란 건 아예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 앞에서 다가간 제자들은 다짜고짜로 예수님에게 질문하기를 “선생님, 이 사람이 이렇게 소경으로 태어난 게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제자들의 이런 질문은 소경의 모습이 하도 딱하게 보여 진심으로 울어나온 동정심입니까, 아니면 정상인으로서 비정상인을 향한 가벼운 호기심입니까?
<누구의 죄냐>라는 이 제자들의 질문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타당하고 근거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불행을 당한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성서 욥기에 보면 졸지에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게 된 의인 욥을 향해 그의 친구들은 “회개”하라고 설득하고 다구쳤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졸지에 망하게 된 이유를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욥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소경된 사람을 향한 제자들의 질문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가 소경이 된 이유는 틀림 없이 그의 부모나 그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오늘 우리 주변에도 여전합니다. 어떤 이들의 불행을 그 사람의 탓으로 간주하고 자기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대개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가 참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할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안됐다고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 책임이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지금 태백을 중심으로 한 탄광촌의 쇄락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곳에서 수십 년 동안 살던 탄광 인부와 그 식구들의 호구지책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 평생의 젊음을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도시에 나와서 별로 할 일도 없습니다. 폐광은 늘어가고, 언제 그 위험한 일자리라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는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정부나 국민들의 시선은 별로 따스하지가 않습니다.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깁니다. 자기들의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아마 자기들이 매우 전통적인 사상과 신학에 정곡을 찌른 질문을 제기했다고 내심 흐믓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자기들의 예상과 빗나갔습니다. 3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인간의 장애와 고통과 불행은 자네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참으로 많이 봅니다.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하게 그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지난 19일에 발생한 호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로 인해 수 많은 인명, 그것도 탁아소 시설에서 놀던 어린아이들이 죽었습니다. 작년 우리 나라의 성수대교 붕괴 때도 등교길의 학생들이 여럿 죽었습니다. 테러범들의 잔혹 행위와 다리 건설 담당자와 보수책임자들의 무사안일로 인해 그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만,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죽음이 그것과 연결되고 있는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의 심정이 어떨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당한 고통 앞에서 <누구의 죄냐>라는 질문이 타당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죄 때문에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불행을 향한 관점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고통에 대해 너무 쉬운 대답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전 간단히 진단해 버립니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어떤 미국 영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국민학교 학생 하나가 자동차 사고를 당해 죽었습니다. 주일 그 이야기를 들은 어느 수녀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그 아이가 지난 주일에 성당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단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죽은 아이의 친구가 쇼크를 받아 그 다음 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쉽게 말해 버린다면 그건 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이 됩니다. 스스로 고통과 불행을 하나님의 뜻으로 깨달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적인 길을 발견한다면 가장 좋겠습니다면, 제 삼자가 간단한 대답을 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게 아니다.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다. 인간의 죄 보다 더 깊은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숙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걸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그게 무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번역 성서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무얼까요? 구원역사입니다. 선천적으로 소경인 그 사람이 구원받는 일, 즉 눈이 뜨이는 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반 유대인들 처럼 그가 어떤 죄를 지어서 그런 불행을 타고 났는가, 하고 질문했던 제자들의 관점이 아니라 그가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간절한 희망과 사랑 가운데서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관점이었습니다. 이건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소경의 불행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과 동일시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경은 동정심을 받거나 흥미의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나타내야 할 이들이었습니다.
장애자 문제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장애자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실행해야 할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장애자는 우리 사회에서 떠맡아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해야할 우리의 자신의 아픔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선 장애자를 너무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약간 다를 뿐이지 우리와 똑 같으며, 사실은 우리 자신입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고, 물체를 보지 못하고, 발음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불편합니다만, 그런 결함 때문에 그 인격 까지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말아야 합니다. 프로 야구 선수나 축구선수가 보통 사람을 향해, 당신은 나 처럼 공을 잘 다룰 줄 모르니까 열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처럼, 일반인들이 지체장애자들을 그렇게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장애자들을 향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어떱니까? 우리 나라의 도로나 공공시설에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사실, 있다고 해도 겨우 생색만 낼 뿐이라는 사실은 항상 지적되어 왔습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데 까지 신경 쓰는게 귀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장애자들은 거의 실내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누가 도와준다 해도 외출이 너무 어렵습니다. 유럽 같은 데는 장애자들이 참 많이 외출을 합니다. 얼핏 보면 우리 나라 보다 장애인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장애인을 향한 편견이 우리 보다 작을 뿐만 아니라 실제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활동하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은 단순히 불쌍하다고만 생각할 뿐이지 우리의 일부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애자들에 대해 우리는 인색합니다. 간혹 이런 지체장애자를 위한 시설을 지으려 할 때 동네 사람들이 발벗고 나서서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정박아 시설이 들어서면 땅값이 떨어진다거나 자녀 교육에 좋지 않다고 해서 반대합니다. 평소에 마음이 착하던 사람들도 이렇게 자신들의 이해에 관계되기만 하면 열을 올려서 반대합니다. 장애자들의 고통이 자기들과는 아무 관계 없는 문제라는 생각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상쾌한 소식을 얼마 전에 우리가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소식지에도 뽑아 실었습니다만, 선천성 뇌성마비 어린이인 이상철군이 서울 일원국민학교 3학년3반 어린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반 아이들과 아무 격의 없이 지내는 이군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러웠으며, 겉으로 보기에 흉한 친구을 자기들의 대표로 뽑았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친구 처럼 지내는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감동시켰습니다. 이군의 어머니 김학선 씨는 자기 아이가 그런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꿋꿋하게 길렀습니다.
교회는 장애자(여기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포함된다)들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시선을 바로 잡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년 부터 <장애자 시설>을 위해 정기적으로 조금 씩 지원하고 있긴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진 못한 형편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의 형편이 나아지게 된다면 현풍 지역에서 앞장 서서 이런 일들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결국은 그런 목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소경은 어떻게 되었나? 4-7절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합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누구의 죄냐, 고 묻는 제자들에게 그런 질문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야할 자리가 있습니다. 밤이 오기 전에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의 획복을 위해 철저하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 하나님 나라, 하늘의 뜻은 장애자와 정상인의 구별이 없는 세상이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자꾸 구별해서 한쪽은 잘난 체 하고, 다른 한쪽은 열등감에 빠져서 사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 뇌성마비로 온 몸이 꼬여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직접 할 수 없으면 그런 일을 돕기라도해야 한다.
내 발에 가시가 들어오면 그렇게 고통에 대해서 민감했었더랬는데...
남의 고통에는 무심하게,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었던 것이 크게 회개가 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