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6:3-10, 궁핍 속의 부요

조회 수 8593 추천 수 0 2009.07.11 22:51:18
 

95.6.11. 설교

궁핍 속의 부요

고후6:3-10


오늘 우리는 지난 중에 이어 바울의 가르침에 따른 고난과 풍핍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풍요로운 시대가 가난과 풍핍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는 죄와 악으로 생각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면 일단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자기 소유를 늘리는 일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자면 어쩔 수 없이 소유물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주가 되고 사는 문제가 종이 된다면 이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런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 시대에 파묻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이 세상살이에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도 풍부하고 여유로운 생활에 매여 살지 않는 게 훨씬 행복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사는 게 부요한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에 대한 대답을 줄 것입니다.

오늘 말씀 3-10절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봉사직이 흠잡히지 않도록 무슨 일에 있어서나 (남에게)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의 봉사자들이니 만큼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을 그렇게 내세웁니다. 곧, 많은 인내를 하면서, 환난과 역경과 곤경에 처해서, 매질과 감옥과 난동을 겪으면서, 수고와 밤샘과 단식을 하면서 그렇게 하고, 순결과 인식과 관대함과 친절함과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속에 의로움의 무기를 드는 경우에도, 또 영예를 얻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악평을 받거나 호평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자 같으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죽은 자 같으나, 보시오,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처벌을 받은 자 같으나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는 자 같으나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이를 부요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10절을 보십시요. “슬퍼하는 자 같으나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이를 부요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가슴에 무슨 불이 타고 있기에 이런 놀라운 말들을 토해낼 수 있었을까요?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전실존을 던져 투신하는 자만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대로 가난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 그야말로 진정한 부자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재산의 크기로 그 사람이 부자가, 아니다를 판단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재산과 부가 인간을 평가하는 잣대라는 사실을 너무나 뼈져리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부를 축적하는 걸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 자본이 축적되어 또 다시 생산성을 높히게 되므로써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어느 정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삶의 형태가 인간에게 삶의 가치과 행복을 보장해 주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가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브레이크 없는 벤츠’ 처럼 경쟁에 뛰어듭니다. 10을 가진 사람은 20을 가진 사람을 경쟁으로 여기고, 20을 가진 사람은 100을 가진 사람을 경쟁으로 여깁니다. 경쟁에서 이길 방법이 발견되기만 하면 밀어부칩니다. 법망을 피해가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면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여기에는 사회적 선이나 윤리가 개입할 틈이 없습니다. 이런 무모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때로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패배의 눈물을 흘리면서 끊임 없이 싸웁니다.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 결과는 무얼까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쌓아논 재산이 있는게 아닌가, 라고 반문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대체 인간이 무얼 얼마나 이 세상에 쌓아 놓을 수 있습니까? 남 보다 조금 더 많은 땅과 집과 돈을 남겨둔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걸까요? 우리의 눈에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재산이 대단히 크게 보입니다만 그게 아무 것도 아니란 걸 깨달을 때 비로서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평생 동안 10억원을 모았다고 합시다. 부정하게 벌었다면 아예 거론의 대상도 아닙니다만 성실하게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대단한 것 처럼 보이나요? 100억원은 또 어떻습니까? 물론 그런 돈들이 크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런 건 순식간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사업이 망하기도 하고 사람이 병들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며 이러 저런 이유로 모든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어마어마하게 보이는 재산이 뜬구름에 불과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부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에 비해서 너무나 하잘 것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햇빛을 살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라도 자기의 전 재산을 주고 한뼘의 햇살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수도물 값도 있긴 합니다만 우리는 거의 돈 없이 물을 마시고 삽니다. 인간이 땅을 의지해서 살아가는데 인간이 땅을 사고 팝니다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정작 중요한 걸 우리는 모두 돈 없이 취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우리가 안다면 이 세상의 재물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무언지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로 이 자유를 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걸 그냥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모두 부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온 우주의 주인일진데 우리가 어디 가난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장 값진 걸 선물로 받고 살아가는 풍요로운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만든 아파트나 빌딩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가난한 건 아닙니다. 남이 부러워 할만한 수십 억원의 재산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도 큰 재산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겁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궁핍 가운데서 풍요로움을 알고 살아가는 게 기독교적인 신앙입니다.

교회도 역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교회입니다. 겉으로 보면 작은 교회이지만 실상은 큰 교회입니다. 교회 창립 10주년 기념교회당 건축을 위해 매입한 땅값을 상당 부분 대출받아 지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넘치는 부요함이 있습니다. 지금의 눈에 보이는 어려움만 생각하지 마십시요. 언젠가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넉넉한 교회가 될게 틀림 없습니다만, 우리가 신앙적으로 생각한다면 현재로서도 부요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절실히 깨닫는다면 그것 보다 더 큰 부요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증거가 따르게 됩니다. 그 하나는 이 세상의 어려움 때문에 불안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과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 의연하고 떳떳하게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요.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은 이처럼 대담하게 자신의 봉사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려움이 닥쳐와도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이런 의연한 자세로 살아가는 걸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불안해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가 얼마나 불안해 합니까? 풍요로운 것 같으면서도 내적으로는 불안의 특징을 안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내 자리에서 밀려나면 어떻게 하나, 내 자식이 다른 아이들 보다 공부를 못하면 어떻게 하나, 심지어는 대도시 자하철 공사장 곁을 지나면서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이런 모든 불안은 결국 가난에 대한 불안으로 모아집니다. 다른 사람들 처럼 많은 돈을 벌어 좀 편안히 살아보아야겠다는 다짐이 우리 대한민국 전체 백성들의 한결 같은 바램입니다. 점점 살기는 좋아져도 삶의 불안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와 재산이 인간을 불안으로 부터 해방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재산이 조금 더 많아지면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재산은 인간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어떤 시련 앞에서도 불안해 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재물의 하잘 것 없음을 확실히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걸 갖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기 이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 처럼 재물 때문에 아귀다툼 하듯이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야 할까요?

두번 째의 증거는 남을 부요하게 만들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10 중반절에 바울이 이르기를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겉으로 보기에 가난한 것 같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고, 사심 없이 봉사했습니다.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쁜 세상에 그는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자기 창고에 산더미 처럼 재산을 쌓아놓고 남에게는 인색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따뜻한 마음으로, 또한 가능한대로 물질적으로 돕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이 사실을 뼈져리게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며 그때 부터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말입니다. 자기 소유를 늘려가는 재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전하는 재미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건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죠. 바울 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걸 가진 자라는 그런 정도의 믿음이 있을 때 우리 자신은 비록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께 우리의 생각이 바뀌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기도의 마음도 갖지 못하고 그저 세상 사람들 처럼 자기 소유를 늘려가는 것에만 정신을 빼앗긴다면 예수 믿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본의 나카노 고지가 쓴 <청빈의 사상>이란 책은 청빈을 몸으로 살았던 일본의 역대인물들을 중심으로 청빈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단 소유욕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소유의 증대에만 관심을 빼앗기고 금전의 노예가 되어, 그 밖의 인간의 중요한 일들에 마음이 미치지 못한다. 가족에의 배려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자비라든가,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그 어떤 일에도 기분이 내키지 않으므로, 부자는 반드시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부자들은 소유를 늘리고, 재산의 유지에 급급해서 정신의 자유마져도 잃고 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부러 가난하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처럼 잘 살아야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진정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겉으로 드러난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받을까 불안해 하지 않고 비록 가난하더라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라갈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입니다. 졸부들 처럼 돈에 의지해서 교만하거나 기고만장 해서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바울 처럼 궁핍한 중에서도 부요한 사람들으로 살아가겠습니까? 모두가 풍요만을 찾는 오늘의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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