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2:1-5, 밤이 없는 세상

조회 수 15941 추천 수 0 2009.07.31 22:10:39
 

2006년 4월21일 설교 

밤이 없는 세상

<계22:1-5>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마다 그 신비한 내용과 표상들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밧모섬에 유배당한 요한이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 세계를 전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언어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기괴하게 보입니다. 하늘이 종이장처럼 말리고, 바다에서 용을 비롯한 괴상한 동물들이 튀어나오고, 수정과 오색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하늘나라가 찬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학양식을 가리켜 묵시문학이라고 하는데, 성서 가운데는 요한계시록을 비롯해서 다니엘서나 에스겔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우선 요한의 환상은 환상으로서 의미와 가치를 갖습니다. 이 세계가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관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요한의 환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 요한은 그 시대 기독교 공동체를 향해 훌륭한 멧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놓친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또한 관심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사실은 요한계시록이 비록 초현실적이지만 놀랍도록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표현양식은 현실과 관계 없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철저하게 현실적입니다. 이는 흡사 고대 신화들이 초현실적인 양식을 갖고 현실 인간의 삶을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언듯 볼 때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이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열려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해서 읽어보도록 합시다. 요한은 천사의 인도로 천국을 환상 가운데서 보게 되었습니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보였는데, 이 강줄기가 하나님 보좌로 부터 발원해서 흘러내렸고, 그 좌우에 열 두 가지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이 축복의 땅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었다고 합니다(3절). 여기서 요한은 시적 감수성을 발휘해서 천국의 완전함을 전달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천국은 우선 생명의 강물이 필수조건이었습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강은 인류문명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천국도 역시 이런 물줄기를 안고 있어야 했습니다. 풍부한 수량을 갖고 있는 강은 농사를 가능하게 하고 이로 인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서 본 천국에도 역시 생명수의 가가에 사시사철 열두 종류의 과실을 맺는 과일나무가 줄지어 있었습니다.

특히 5절 말씀을 보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천국의 아름다움과 그 완전함을 “밤이 없는 세상”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항상 비추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어둠이 남아 있질 못하게 되고, 햇빛이나 등불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증거되고 있는데, 이 빛은 고대인들에게 생명 자체였습니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이런 빛도 필요 없고 등불도 필요 없습니다. 빛 자체이신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그래서 신처럼 숭배되던 태양도 별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요한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한계가 극복되는 완전한 생명의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전해 보려했던 메시지는 바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암흑의 권세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새로운 세계가 임박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밤이 없다는 요한의 외침이 오늘 우리에 비해 2천년 전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절실한 구원의 멧시지로 들렸을 것입니다.

요한이 독특한 묵시적 환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밤이 없는 세상”은 무얼 말하는 걸까요? 여러분은 너무나 밝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밤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별로 실감있게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만, 고대인들에게는 그 무엇 보다고 분명한 문제였습니다. 고대인들은 태양이 사라진 밤을 무척이나 두려워했습니다. 동서양의 많은 종족들이 태양을 일종의 신으로 섬겼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이 밤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밤은 낮의 질서가 깨지면서 힘의 질서가 장악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강한 힘을 가진 자가 밤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힘이 없는 자들은 밤새도록 숨을 죽이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다가는 어느 사이에 당할지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밤은 실제로 물리적 세계인 밤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악한 권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로마의 사악한 황제들이 자신들의 실정을 가리기 위해서, 혹은 변태적 성격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권력에 의해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도 역시 순교의 위기를 넘기고 지금 밧모섬에 유배당한 실정입니다. 언제 어느 때 그리스도인을 향한 로마 황제들의 박해가 다시 시작할지 모르는 아주 급박한 시대, 바로 그런 질서는 밤의 세력이었습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던 시기는 바로 이처럼 밤의 악한 권세가 기승을 부릴 때였기 때문에 “밤이 없는 세상”이라는 요한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밤이 없는 세상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악한 질서 때문에 선량한 이들이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못하고 기죽어 사는 그런 세상이 끝장나고 모든 이들이 “왕노릇”(5절후) 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되는 천국일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상에서도 성취(成就)되고 선취(先取)되어야 할 세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밤이 없는 세상”을 이 땅에 이루지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밤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4월20일이 장애인의 날이었는데, 장애인들에게 우리나라는 밤의 세상입니다. 제가 장애인이 아니라서 그들의 절망과 아픔을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저 직관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난다는 건 일종의 저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꼼짝할 수 없습니다. 밖에 나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나, 직업을 선택할 수가 있나,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가 있나, 온통 어둠이 사방을 채우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시각장애인이나 정신박약자들, 그리고 뇌성마비환자를 위한 특수교육 시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나 취약합니다. 8,90% 정도가 거의 공교육을 받지 못하고 대개는 집안에 틀어박혀 지낼 뿐입니다.

실제적인 무관심도 문제지만 장애인을 향한 편견과 냉대가 더욱 문제입니다. 장애인의 날이라고 해서 몇몇 단체에서 행사를 가졌고, 작년에는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장애체험의 날 행사를 갖기도 했습니다만, 장애인을 향한 이 사회의 안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애문제를 일종의 이벤트 사업으로 치장해 보려는 것 같아서 오히려 보기에 민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인을 단순히 동정하는 차원에 머문다면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장애는 수치가 아니라 불편한 생활조건에 불과하다는 걸 장애인이나 정상인이 모두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인식의 전환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하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장애를 인격의 장애로 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은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정상인들을 장애인을 자기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바라봅니다. 이런 점에서 선진국와 우리와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예컨대 구라파에서는 장애아동들이 정상아동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다리를 절거나 몸이 꼬여 있는 아동들이 정상아동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므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정상아동들도 시각 장애아동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그 장애를 일상적인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런 의식을 갖고 성장한 이들이 사회의 중심인물이 될 때 장애문제를 책임 있게 다루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장애아들이 정상아들과 함께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정상아 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장애아와 함께 교육받게 되는 걸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하나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장애문제는 앞서 말한 의식과 발상의 전환 가운데서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풀어가야 합니다. 간혹 장애자들이 훌륭한 예술가로 성공하거나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소위 인간승리를 봅니다만 그게 어디 일반적인 경우입니까? 그런 경우는 사생결단으로 매어달리면서 더구나 운이 따라야만 합니다. 정상인이 기울이는 것에 비해 수십배 노력을 해야만 겨우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장애자 개개인이 그걸 뚫고 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구조 가운데서 접근해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부끄럼 없이 거리를 다닐 수 있도록 교통편의를 제공해야만 합니다. 취업문제도 심각합니다.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2% 이상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법제화 되어있는데도 회사에서는 여러 형편상 그걸 실행하지 않습니다. 벌금을 무는 게 오히려 경제적으로 낫기 때문에 장애자를 고용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이를 좀더 강력하게 시행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았을 경우에 지불해야 할 벌금을 지금 보다 수십배 높게 책정한다거나, 혹은 장애인을 고용하는 사업체에 파격적인 금융혜택을 주는 정책도 가능합니다.

국가가 장애인 문제를 책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종교단체라도 이런 일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이 나라 전체 교회, 혹은 성당이나 사찰에서 일년 재정의 십분의 일만 장애자들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많은 교단들이 외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유지하는 일에는 수십억원을 사용하지만 장애자들을 위해서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는 우리의 장애자들은 평생을 어둠 가운데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에서 환상적인 언어로 서술하는 “밤이 없는 세상”은 바로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요한이 그려주고 있는 대로 천국을 밤이 없는 세상이라고 믿는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밤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없도록 하는데 애를 써야합니다. 하체가 없는 이들이 타이어 조각을 동강난 넙적 다리에 붙들어 매놓고 사시사철 시장골목을 돌며 생활용품을 팔아먹고 사는 이 현실이 깨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역시 인간답게 살아야할 권리가 있습니다. 요한은 5절에서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장애인들이 왕 같지는 못할지언정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와야겠습니다. 이 세상이 모두 똑똑한 사람들만으로, 모두가 건강한 사람만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 또한 불행입니다. 장애문제를 장애당사자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밤이 없는 세상이 빨리 다가오도록 힘을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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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옹기종기

2009.10.18 10:15:41

밤이 없는 세상 말씀에 큰 감명을 얻었읍니다 당시 풍습이나 배경을 알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청직이가 자기착복을 하기위한 수단으로 이자를 불려서 민폐를 끼치는 모습을 듣고보니 오늘의 현실이나 교회의 본 모습에서 이탈감을 지적 아니할 수 없네요 목사님 설교에 많은 은혜입었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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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이방인

2009.10.18 10: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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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에서는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고 사람들의 편견도 거의 없습니다.

장애인들이 오히려 모든 일의 우선이 되어 있고 그것이 당연시되어 있지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 일본 사람들 중에 장애아이를 교육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 온 사람들을 종종 보았습니다.

한국도 그런 사회로 점차 바뀌어 갈 것이라 생각은 합니다.

 

목사님 글 속에 장애인 과 정상인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쓰셨는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표현이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혹시 이 내용도 책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레벨:3]코람데오

2010.01.18 01:53:44

"밤이 없는 세상"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간혹 정목사님이 성경 저자들에 데헤 사용하시는 "고대인"이라는 단어가

제게는 다소 그들의 지적능력과 경험이 현대 배운사람들에 미치지 못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느낌이 듭니다만 ^^

저는 요한이 사용한 "밤이 없는 쌍"을 이해 하기위해서는 목사님께서 본문에서 언급하신 요한 복음 1장의 내용과 성경저자들

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밤" 즉"어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언급이 없이

장애인 문제나 사회적인 이슈로 본문의 본질이 흐려지지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물론 요한이 밤, 빛, 어둠, 낮 등의 단어를 어려가지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그 개념중 한 틀이 "사랑이 없는 상태"를 자주 어둠으로 표현 하였으며 장애인 문제등은 이 의미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무 그러한 방향으로 치중하게 되면 더 핵심적인 요한의 의도들을 케치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선지자 아모스는 "여호와의 은  없는 어둠이 아니며 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다"라고 언급 하였는데

예수를 따라다니며 밤낮으로 말씀을 배운 요한이 이런 구약의 언어들을 이해하지 않고 있을리가 없다 봅니다.

 



[레벨:8]육바금지

2013.07.06 10:52:39

장애아 부모의 입장에서 정상인으로 표현하든 비장애인으로 표현하든 약간의 뉘앙스 차이는 있겠으나 장애자 부모들도 그렇게 엄격하게 단어를 구별해서 쓰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보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표현이 공적인 문서에서는 더 적합한 말이라는데는 동감합니다. 
저도 장애아를 키우면서 왜 학교시설에서는 장애아들이 종종 보이는데 성인 장애인들은 대체 다 어디 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장애인들의 수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기도 하고 그랬죠. 알고 보니 거의 다 격리된 시설에 성인들은 있기 때문에 비장애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좀처럼 없습니다. 제가 있는 교회에서는 장애인들 시설도 운영하고 장애아 예배가 따로 있고 교회내 접촉이 많기 때문에 교인들이 정신장애아를 보거나 만나는데 별로 어색해 하거나 이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동정이나 후원도 필요하지만, 되도록 사회나 교회안에서 정신장애자를 많이 접촉해 보아야 어색하게 여기지 않게 될겁니다.

장애인을 거의 만나지 못하다가 갑자기 보게 되면 다들 무서워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합니다. 조선말 서양사람을 처음 보고 기겁하거나 심지어 비명지르며 도망도 가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영화 매체 여행등을 통해서 자주 만나니까 백인이 있다고 기겁하지 않는거랑 비슷하죠. 물론 딱 맞는 비유는 아닙니다만.

코람데오님 이 글은 그렇게 학문적 엄밀성을 가지고 쓴 글은 아니고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서 성서를 약간 차용한 정도라서 굳이 심각하게 생각지 않으셔도 될듯 합니다. 또한 서로 학문적으로 다른 입장일 수는 있겠으나 세베데의 아들 제자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썼을 가능성은 학자들간에서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겁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는 같거나 적어도 같은 공동체의 사람이 썼다고 보지만 계시록은 그들과 다른 공동체 다른 사람이 썼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견해거든요. 따라서 요한복음과 구약성서 그리고 계시록을 같은 레벨에 두고 해석하는 건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한의학에서도 같은 용어 예를 들어 체질을 가리키는 말인 소음 태음 태양 소양 의 말들도 각 의학파에 따라서 이리저리 제각각으로 사용되거든요. 오늘날 한의사나 학생들이 이런 시대와 배경철학이 다른 배경을 이해못하고 짬뽕해서 자기 나름대로 용어를 써서 참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여러 용어도 같은 상황이더군요. 참고하세요.

[레벨:8]육바금지

2013.07.06 11:01:27

 그리고 차라리 구약과 계시록을 비교하려면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같은 레벨에서 비교하셔야 한다고 보고요, 어차피 따지고 보면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신학에 대항마처럼 나온 복음서라고 봐야 하고, 계시록은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문학의 장르이기때문에 요한복음과 계시록은 전혀 다른 장르의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오히려 종말론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는 게 특징이구요, 계시록은 철저히 종말론에 입각한 문서이기때문에 서로의 주제조차 전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책을 같은 요한이라는 이름때문에 혼용하시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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