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8:1-10, 굶주림의 문제

조회 수 9425 추천 수 2 2009.07.31 21:48:12
 

1996.1.7. 설교

굶주림의 문제

막8:1-10


앞으로 대망의 2천 년대가 4년 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UN이 금년을 ‘빈곤퇴치의 해’로 정했다는 건 이 시대가 얼마나 처절하고 절박하고 무력한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2천 년 전 로마가 누렸던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절대빈곤층의 증대라는 이상한 현상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2천 년 전에 비해 오늘의 생산력은 수백 배, 혹은 수천 배 상승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굶주림을 가장 현실적 시련으로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건 무슨 이율까요? 이 말은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차이가 점점 많이 벌어진다는 걸 뜻한다 하겠습니다. 잘 사는 이들이 옛날 보다 훨씬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면에서 물자가 대폭 늘어났지만 여전히 절대빈곤을 면치 못하는 이들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빈곤문제는 그냥 내버려 두어도 결국 좋아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날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집니다. 지구적인 차원에서 매우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이 빈곤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UN에서 그걸 금년의 주제로 삼았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우리 남한 사회는 매우 빨리 서방 선진국을 따라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물자가 넘치고 넘치는 상태기 때문에 빈곤이다, 굶주림이다,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별로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좀더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절대빈곤은 여러 모로 인간을 파괴시킵니다. 여유가 없으니까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없고, 교육을 못 받은 젊은이들은 또 다시 불리한 생활 조건 가운데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들은 현대 문명의 이기들로 부터도 역시 도태되었고, 의료의 도움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됩니다. 아마 절대빈곤층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어려움은 굶주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먹지 못하면 당장 죽게 되고, 먹는다 해도 영양이 충분하지 못하면 체력이 약해져서 질병에 감염되기도 쉽습니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인간을 파괴시키는 절대빈곤과 그로 인한 굶주림은 우리 모두가 싸워 물리쳐할 악한 질서입니다. 우리에게 직접 당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굶주림과 절대빈곤의 현실을 외면한다는 건 이 세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매우 무책임한 노릇입니다.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로서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절대적 빈곤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마가복음 6:35-44의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과 흡사합니다. 지역적으로 볼 때 6장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많은 곳이고, 여기 8장은 이방인들이 많은 곳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위해 양식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적은 빵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먹게 되었다는 이런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먹거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였는데, 그들에게 먹을 게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먹지 못하고 지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면 먼 길을 가야할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돌아가다가는 길바닥에 쓰러져 큰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요기를 해서 보내야겠다. 불쌍해서 볼 수 없구나.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이 광야에서 그들에게 먹을 걸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지금 제자들이 갖고 있는 먹을 게 무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떡이 일곱 개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을 잘 정돈해서 앉게 하시고 일곱 개의 떡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후 제자들을 통해서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제자들에게 있는 걸 아시고 그것도 그렇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아보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대충 4천 명 쯤 되었는데,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 지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다는 걸로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 이야기가 전개되던 그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많는 사람들이 모여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냈는데, 별로 먹을 게 없어서 굶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옆에서 느끼는 기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흘 동안이나 굶었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광야였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을 사 먹일 만큼의 돈도 돈이려니와, 그런 빵을 찾아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굶주림이 바로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처럼 먹을 게 지천으로 깔려 있는 세상에서 굶주림의 이야기는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얼핏 보면 이 세상은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근처 있는 승우유통에만 들어가 봐도 먹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채소로 부터, 우유, 요크루트, 통조림, 과자, 맥주, 각종 음료수, 아이스크림, 그 이외에서 수백 가지의 먹거리가 있습니다. 삼십년 전 까지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어서 5,6월만 되면 뿔뿌리를 캐먹기도 했다지만 이젠 굶주림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여전히 굶주림에 직면해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UN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고 판단해서 금년을 <빈곤퇴치의 해>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절대빈곤>의 척도는 지난 90년 세계은행이 정한 연 개인소득 3백70달러에 못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림잡아 30만 원 정도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 있지 않으면 1만 달러에 도달한다고 하는데 이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합니다. 이런 절대빈곤 층이 지난 90년에 11억 명이었는데, 현재는 15억 명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온 세계가 경제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절대빈곤 층, 말하자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이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건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매분 47명의 어린이와 매년 2천5백만 명의 극빈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세계인구의 20%가 하루 1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고 있습니다.

이 빈곤의 정도는 개발도상국에서 유난히 심각한 형편인데, 빈곤층이 몰려 있는 최저개발도상국의 숫자가 71년에 25개국에서 현재 48개국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나라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근처의 여러 나가가 그렇습니다. 이런 저개발 국가만이 아니라 카나다, 미국 등 선진 북미의 나라들이나, 서유럽 연합국가들도 역시 빈곤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실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중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의 얼굴은 잘사는 선진국 얼굴이고, 다른 한편은 못하는 후진국 얼굴입니다.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경제수준이 상승한 것만은 분명합니다만, 여전히 최저 생활비로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정부 보조금으로만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지난 연말에 현풍 국민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어린이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그 할머니가 고맙다는 전화를 주셨는데, 입에 풀칠을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절대빈곤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서울 청량리 어느 굴다리 밑에서 매일 점심을 제공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물론 그곳 이외에도 여러 종교 단체에서 결식노인들을 위해 하루에 한 끼니 씩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기도 합니다. 지난여름 서울 형님 댁에 갔을 때 확인한 것니다만 천호동 성당에서도 매일 점심을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오시는 분들은 독거노인들이거나 부랑자들이어서, 이렇게 따뜻한 한끼 식사에 생명을 걸어놓고 살아갑니다. 이런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보아도 아무리 우리의 경제수준이 올라가 일만 달러에 육박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그런 혜택을 볼 수는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굶주림과 매일 싸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흘이나 굶은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말고 요기라도 시켜보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당혹해 했을 것입니다. 이 자리가 저자 거리라면 모를까 인적이 드믄 광야에서 갑자기 먹을 걸 준비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남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일곱 개였습니다. 이 일곱 개의 떡은 제자들이 시장하면서도 자신들의 선생님이신 예수님께 드리기 위해서 몰래 몰래 남겨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곱게 남겨 둔 일곱 개의 떡을 예수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여기서 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일곱 개의 떡은 사천 명이나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나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기아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데는 일곱 개의 떡이 톡톡한 노릇을 했습니다. 일곱 개의 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 굶주림의 문제는 나눔의 문제입니다.

일곱 개의 떡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나눔의 삶이 무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약 제자 중에 어느 누가 이 떡을 감추어 두고 내놓지 않았다면 그 당시 굶주림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곱 개의 떡이 축사된 후 사람들에게 나뉘게 되자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도 남게 되었습니다. 만약 인간이 나눔의 삶을 실천하기만 하면 굶주림의 문제는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30%에 가까운 이들이 절대빈곤 층에 속한다는 사실, 그리고 1억 명에 이르는 15세 이하의 소년 소녀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연유합니다. 만약 잘 사는 나라에서 먹고 남는 부분들을 극빈한 나라에 보내주기만 한다면 대단히 많은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미국이나 프랑스 개들이 먹어대는 통조림 소고기만 절약한다면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의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인간은 영국에서 태어난 개만도 못한 실정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여전히 우리가 나눔을 삶의 기초로 삼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게 됩니다.

나눔을 삶의 기초로 삼지 않는 인간이나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제 벌어서 저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한다면 그건 짐승과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좀 깨친 맹수들은 그래도 나누어 먹을 줄 아는데 하물며 인간이 그렇지 못해서야 어디 말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성 제고라는 면에서 다이나믹을 갖고 있습니다만 나눔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무기력합니다. 자본이 이념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재물과 자본을 모으려고만 했지만 그걸 나눌 줄은 모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자기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죄는 아니겠습니다만 우리의 체제는 그게 지나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연말에 우리의 두 전직 대통령이 수감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다른 일은 접어두더라도 천 억, 이천 억씩이나 비자금을 긁어모아 그걸로 부동산 투기도 하고 사채놀이도 했다는 건 개인의 인간성 문제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무자비 했습니다.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가족, 사돈, 친인척 이름으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숨겨놓고 퇴임한 후에 계속해서 교묘하게 관리했다고 하는데, 부동산 차액은 그만두고 금융 이자만 해도 수백억 원에 이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동정하는 경북 대구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게 참으로 어처구니없습니다만,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이란 게 슬플 뿐입니다. 나눔은 없고, 그저 긁어모으는 것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 사회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GNP 1만 달라, 아니 2만 달라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삶의 질을 하수구만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도 사실은 이런 나눔이라는 정신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득 중에서 일부를 떼어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는 그 돈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쓰이기를 바라면서 드립니다. 이 헌금은 목사생활비, 구제비, 선교비, 교육비 등으로 쓰입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 중에서 일부는 아프리카나 파키스탄 등에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구제비로도 사용됩니다. 이것만큼 더 의미 있게 재물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우리는 헌금행위를 통해 사랑을 나누며, 또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2. 나눔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일곱 개의 떡은 그곳에 모인 사천 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작은 떡 덩이입니다만 그런 데서부터 진정한 나눔의 실천이, 나눔의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작은 나눔이야말로 이 세계를 굶주림의 악순환으로 부터 인간을 구원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십시오. 우리 대다수는 눈에 뜨일 정도로 이 세계를 변화시킬 능력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건 일곱 개의 떡 뿐입니다. 그러나 그게 큰 역사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간혹 수십억 원의 유산을 대학이나 병원에 기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장하고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큰돈만이 큰일을 이루어 내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것을 나누는 이들이 많을 때 진정으로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교인 수나 재정 면에서 아주 작습니다만 나름대로 나눔을 실천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니세프, 사랑의 쌀 나누기 등의 단체와 협조하기도 했으며, 북한 수재민을 돕는 헌금도 보냈고, 대창양로원을 방문하거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액수였습니다만 우리는 이런 우리의 나눔에서부터 세계구원의 역사가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우리 교회의 재정 형편이 좋아지게 된다면 나눔의 실천을 보다 확실하게 해야겠습니다. 여기서 부터만 교회의 교회다움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굶주림과 멀리 있다고 해서 굶주림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것만이 교회의 기능은 아닙니다만 굶주림의 문제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알아 서로 나눔의 삶을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가난하지만 나눔이 무언지를 알고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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