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1:9-14, 아들의 나라

조회 수 4212 추천 수 0 2009.05.05 12:42:58
 

1995.3.12. 

아들의 나라

골1:9-14 


2천 년 전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이 뿌려지고 알려졌을 때 그건 일종의 혁명적인 힘이었습니다. 복음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 힘에 근거하여 악조건 가운데서도 복음이 세계 곳곳으로 확장될 수 있었고 지금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혁명적인 힘을 오늘은 거의 상실해 버린 상태입니다. 이제는 복음을 삶의 변화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단순히 종교적 교양 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원래적 복음의 성격인 혁명적인 변화를 받아들이며 살아가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적인 혁명이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볼쉐비키 혁명 처럼 칼과 총으로 이 세상을 뒤집어 버리는게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뒤바꾸므로서 결국 세상의 변화 까지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 영적인 혁명이야말로 어떤 세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힘입니다. 우리가 진정 복음적으로 살기만 하면 큰 힘을 갖게 됩니다. 그 복음의 힘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초대 교회의 영적인 변화가 무엇인지 오늘 말씀에 증거되어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옮겨졌다는 말은 고대시대에 전쟁에서 패배한 백성들이 강제로 이주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처럼 완전히 그 거처가 달라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나라에 옮겨졌음을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전혀 다른 삶의 근거에서 그들은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직장에 나가야 하고 밭에 나가 일해야 하고, 양도 키워야 했지만 그들은 지금 까지 살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 가운데서 그들은 이 세상과의 선한 싸움에서 조금도 물러섬 없이 나설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디 출신인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자세가 많이 달라집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대개는 파키스탄이나 인도, 혹은 베트남 같이 저개발 국가에서 온 이들인데, 그들의 표정은 대개 두려움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미국인들을 보면 자신감이 넘쳐서 때로는 교만하기 까지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3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자기들 나라에 대한 믿음이 없는 반면에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미국사람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아들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의 변화가 바로 인간혁명입니다. 자신의 지위가 하늘 나라에 까지 높아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보다 더 큰 혁명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아들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자답게 자기의 존엄성을 발견하는 것 보다 더 큰 복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들의 나라에 속했다는게 그저 자리가 높아졌다는 것이나 세상적인 기준에서 어떤 특권을 갖게 된다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해서 존엄성을 갖추는 건 아닙니다. 특별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파렴치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아들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은 인간을 비인간화 하는 모든 질서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걸 뜻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만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켰던 초대 교회의 복음과 관계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들의 나라>가 실제로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 바울은 15-20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니.....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들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임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 나라입니다. 이러한 아들의 나라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아마 <구원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 속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의 나라를 향한 희망이 없는 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것 자체로 구원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과 대적하곤 합니다. 자주 악한 권세가 이 세상을 지배하곤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13절)고 씁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흑암의 권세로 부터 우리를 아들의 나라, 구원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흑암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초대 교회 당시에 사람들은 이 세상을 선과 악, 낮과 밤, 빛과 어두움으로 구분했습니다. 이 두 세계가 충돌하며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초대 교회도 역시 그런 사상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더구나 바울 같이 헬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던 사람들은 헬라인들이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이런 사상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세계를 깊이 통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계 안에 아주 나쁜 세력과 질서가 이리 저리 활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이 끝 없이 전쟁하고, 살인하고, 전쟁에 패배한 이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고, 여자들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는 걸 보고 어떻게 악한 흑암의 권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흑암의 권세는 고대만이 아니라 오늘도 역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문을 들쳐 보면 그곳에는 온통 그런 이야기들로 뒤덮혀 있습니다. 어제 석간 매일 신문 사회면을 대충 훌터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입찰 비리로 수배받아온 인천 지법의 집달관이 서울 고등법원에서 버젓이 근무하고 있다, 경상북도 민생치안 불안하다, 대구시가 5년 사이 4백만평 녹지 해제하여 자연환경을 파괴하다, 달성 다사 탈법 아파트 공사, 영생교 신도 살해 암장 사실로 드러나, 농심각박... 놀부농민 는다, 아버지 때려 숨지게한 아들 구속.... 거의 우리는 매일 같이 이런 사건들 틈 속에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어떤 부인이 자기 딸과 생일 초대를 받아온 그 친구들을 아파트에서 떨어뜨려 죽였다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도 파괴하고 다른 사람도 파괴하는 그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일은 분명히 흑암의 권세가 행하는 일입니다.

물론 아름답고 푸근한 일들도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어쩌면 좋은 일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 우리 인간은 흑암의 권세에 사로 잡혀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잘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그런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건 누가 파렴치한, 반사회적인 행위를 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일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는 더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흑암의 권세를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 인간이 선한 일을 할 때도 혹은 악한 일을 할 때도 있긴 하지만 우리가 참된 생명 안에서 살아가지 못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와 참된 해방을 별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런 증거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자. 그냥 하루의 삶만이라도 잘 들여다 봅시다. 무엇이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무언가에 억제를 당하고 살아갑니다. 긴장과 불안과 걱정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어려운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미리 앞서 걱정하거나 과장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평안하지 못합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도 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살았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니면 5백년 후 우리의 후손, 그리고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나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은 다르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슬퍼하고 이기적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 신자들이 경험했던 삶의 무기력과 좌절과 흑암의 권세는 오늘 우리의 경험과 비슷합니다. 그들도 역시 긴장하고, 죄악 앞에서 부끄러워 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곤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그런 세상의 세력을 흑암의 권세라 했습니다. 이제 이런 세상에서 진정으로 구원받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아들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된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했습니다.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길이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런 신앙의 전통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진정한 구원의 생명에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런 일들이 겉으로 유별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금빼찌를 양복 왼쪽 깃에 달고 나니는 것 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증명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답게 살아가므로써 우리가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음을 알게 됩니다. 신앙이란 우리 삶의 자세이며 결단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이 판단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말한 것은 그렇게 살아갈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삶의 능력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나라>에 옮겨진 자 처럼 살아가는 삶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기쁨으로 견디고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견딤>은 헬라어로 <휘포모네>인데, 이는 어떤 일에 참는 능력만이 아니라 견뎌내므로써 어떤 것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꾸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세력 앞에서도 포기되어지지 않는 승리의 정신입니다. <오래 참음>은 <마크로투미아>인데, 이는 사람에 대한 인내로서 아무리 실망스러운 일을 보여준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흑암권세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들의 나라>에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견딤과 오래 참음을 기쁨으로 수행하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참고 견뎌내는 힘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데,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기쁨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심한 시련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기쁨으로 참고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 깊숙한 곳에 기쁨을 간직한 사람이 바로 <아들의 나라>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크리스챤신문> 3월11자 정학진 목사가 쓴 <깊은 생각 짧은 얘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학교 2학년 경미 양이 백혈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경미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참 이상해요. 현실을 보면 힘들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처럼 기쁘고 감사할 수 없어요.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순간순간이 감사해요.” 백혈병 걸린 딸의 어머니가 뭐 기쁠게 있겠습니까만 그녀는 딸의 불치병 앞에서 새롭게 삶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파괴적인 세력이 우리를 침범한다고 해도 기쁨으로 기다리도 참을줄 아는 자들은 결국 승리할 것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구원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의 삶입니다. 그렇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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