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4:1-8 바울의 유언

조회 수 7386 추천 수 0 2009.05.05 12:47:50
 

1995.3.19. 

바울의 유언(딤후4:1-8)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던 바울이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6절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마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런 것처럼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온 정열을 다 바쳤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구원사역과 그 복음을 기억하면서 가장 사랑하고 믿을 만한 제자에게 거의 유언과 같은 뜻으로 오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아무에게나 유언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죽음 앞에서 말한다고 해서 다 유언이겠습니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자식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을 일반적으로 유언이라고 합니다만, 대개는 재산분배가 그 핵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식들도 그걸 기대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자리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 신앙인들도 그런 유언이나 한다면 우리는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울은 물론 물려줄 재산도 없을 뿐더러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식이나 재산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걸 유언으로 남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주 엄한 자세로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사람에게는 마지막 때가 가장 중요합니다. 태어날 때야 순전히 타의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굉장히 차이가 심합니다. 서울의 어느 달동네에서 맞벌이로 겨우 먹구 사는 집, 그것도 남자가 허구헌 날 술이나 마셔대는 그런 집에서 태어난 아이와 가문도 좋고 재산도 많고 인격적인 부모 가운데서 태어난 아이를 비교해 보십시요. 하늘과 땅의 차이일 겁니다. 좋은 나라는 그런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평생을 지나면서 인간은 어디서 출생했던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며, 특히 죽음에 직면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죽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가, 모슨 유언을 하게 되는가에 따라 그 인간의 전체 삶이 판단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바울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디모데에게 엄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온 생애를 바쳐 진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작년 일년 동안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바울이 어떻게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과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 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인생이 오직 한 가지 일에 매진 할 수 있다는 건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오히려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일을 평생 동안 추구했다는 것은 특별한 사명감을 갖지 않는 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디모데에게 그 일을 계속해서 수행하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이 살던 시대로 부터 2천 년이나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전도인의 직무를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다는 건 거짓말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어린 아이들이 위인전을 읽을 때 받는 감동만큼도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감동이란 건 같은 마음을 느끼는 것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바울의 삶을 미화시키고 이상화 시켜 버리므로써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현대 그리스도인들 속에 들어 있는 자화상입니다.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그런 감격을 갖고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라고 유언을 하고 있지만, 이를 읽는 우리는 그렇게 살다 간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머물고 맙니다. 조금 더 진지한 사람들은 참 훌륭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이 말씀을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란 걸 절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한 그 복음 가운데서 사는 것 보다 더 위대한, 더 참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오직 이것 한 가지로 모아져야 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도자의 직무를 갖고 삽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분을 통해 참된 구원이 임한다는 그 사실을 전하는 게 우리 전체 인생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가 전도, 혹은 전도인의 직무를 생각할 때 두 가지 혼란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를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까요? 전도직의 직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로 전도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에 전도는 목사 같은 직업적 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어른들이나 일꾼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말 중요한 건데 전도를 세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간혹 판매왕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실립니다. 자동차, 전자제품, 보험을 남보다 훨씬 많이 판매했다고 해서 선발되는 사람들입니다. 일년에 혼자서 5백 대 이상의 자동차를 팔기도 하고, 여자의 몸으로 전자제품을 수십억 원 어치나 팔기도 합니다. 대단한 재주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도 전국 전도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도 합니다. 일년에 오백 명을 전도했다, 혹은 백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모두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자동차를 세일 하듯이 어떤 판매기술을 통해서 복음을 세일하는 걸까요? 많은 교회에서 그런 전도기술을 가르칩니다. 이사 온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을 하는가,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호감을 줄 수 있는가 등등의 전도기술을 가르치고 배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일을 외판과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다른 일입니다. 전자제품을 파는 사람은 설령 자기가 그 전자제품을 쓰지 않아도 그럴듯하게 선전하고 팔아야 합니다. 세일즈맨들은 자기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고객에게 친절하게 대하거나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복음전파는 판매기술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어떤 의도를 갖지 않습니다. 교회 부흥이라는 것도 복음 전도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건 복음전파에 의한 결과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의 직무는 전도자의 직무를 자기 삶으로 여기는 신앙적 결단이며 고백입니다. 또한 자동차 세일은 그 직장에 다닐 동안에 돈을 벌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하는 일입니다만 전도자의 직무는 우리가 죽을 때 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전도의 결과에 관계없이 <도를 전하며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죽도록 우리는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우리에게 기회가 오던지 그렇지 않던지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처럼 매일 가가호호 방문하며 교회에 나오라고 전하는 것만이 전도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들은 그 일을 억지로라도 합니다. 모든 교인이 의무적으로 가정을 방문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있었도 그 애를 업고서라도 둘 셋 씩 짝을 지어 방문을 합니다. 그런 열정만은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가능하다면 그런 전도도 좋겠습니다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가 일상적인 일을 접어두고 거리로 나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그런 전도인의 직무 가운데서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에 힘쓰는 겁니다. 어디서 무얼 하든지 “나는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생각, 그런 사명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복음의 능력은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 앉아있을 때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교회 밖에만 나가면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그저 세상의 경험에 의지해서 살아간다면 그게 어디 기독교적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 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나의 남편, 혹은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부모나 나의 자녀에게 우리가 복음으로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이 없어도 가정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을 갖지 않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정말 인간적인 정으로 함께 지낼 수 있긴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 보다 더 철저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성서말씀에 더 철저하기 원한다면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가 복음과 그리스도의 도(道)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만날 때 마다 “예수 믿어라, 교회에 나와라, 구원받아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을 통한 희망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고, 지금 유언처럼 디모데에게 그런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하라고 외칩니다. 그가 평생 동안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전한 이 말씀을 우리는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근신하여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걸 각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도인의 직무를 갖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직업을 잃는 일은 다반사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체적 린치를 많이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야 그런 고난이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시대에 바울이 말하는 전도인의 고난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고난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울이 3, 4절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복음대로 살아간다면 많은 충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과도 마찰이 생기게 됩니다. 하물며 세상에서 옳게, 의롭게 살아가려면 허탄한 세력과 충돌될 수 밖에 없으며, 그러다 보면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예컨대 관료세계의 부정을 고발했다가 불이익을 당한 공무원들, 혹은 그런 젊은 법관들도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세계 속에서 모든 일에 <근신> 하라고 바울이 권면합니다. 전도인의 직무를 수행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근신>이란 <nephein>인데, 이는 자신의 감정과 식욕과 정신을 자제할 수 있는 운동선수 처럼 침착하고 자제력 있는 사람들 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하려면 허둥대지 않고 모든 일에서 절제할 줄 아는 근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직무를 다 하라고 권면하면서, 8절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위로합니다. 전도인의 직무를 평생 동안 힘쓴 바울은 이제 죽음을 앞두고 의로운 재판장인 예수 그리스도가 줄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누구나 이 땅 위에서 한번만 살게 됩니다. 바울과 같은 시대에도 여러 정치가, 사업가, 예술가, 관료들이 있었습니다만 바울은 자기가 선택한 전도인으로 살았습니다. 비록 그가 권력을 쥐어보지 않았지만,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는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외칩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어떤 말을 남기게 될까요? 바울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의의 면류관은 자기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전도인의 직무가 바로 자기의 인생으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음을 믿습니까? 전도인의 직무에 소홀치 마십시요. 이게 바로 바울의 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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