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미쳤다는 소문

조회 수 8112 추천 수 219 2006.03.06 18:56:16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눅 4:22)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급기야 예수의 친척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들은 그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고 한다. 이런 보도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운지 지금 우리가 그것의 실체적 진실을 완전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또한 본문이 표현하고 있는 친척들 안에 가족들도 포함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른 대목에서 예수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예수를 찾아왔을 때 방문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방문을 받은 예수가 가족애를 적극적으로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가족들도 예수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개연성은 높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그들도 역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다만 성서기자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친척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와 가족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보호하려는 것 같다. 어쨌든지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는 건 그 당시 예수에 관한 소문이 상당히 흉흉했다는 의미이다.
도대체 예수가 미친 것처럼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예수보다는 세례 요한이 더 해괴한 모습으로 살았다. 요한은 광야의 야인처럼  약대 털옷을 입고 지팡이를 든 채,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일상과 전혀 다르게 살았던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을지언정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양심을 날카롭게 파헤친 그의 도덕적인 설교는 그가 이상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시비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의 비정상적인 생활태도는 오히려 그의 도덕성을 강화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이에 반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면서 평범하게 살았던 예수는 오히려 미친 사람일지 모른다는 소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물론 이런 소문은 그 당시 소위 오피니언 리더라 할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이 퍼뜨린 음모일지 모른다. 모세의 권위에 근거한 율법을 자신들과 다르게 해석하는 예수가 아무래도 께름칙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헛소문을 퍼뜨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태를 단순히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건 별로 바람직한 성서읽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사태가 연루되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의 콘텍스트를 보면 이 귀신들렸다는 소문은 예수에 의해서 벌어진 어떤 현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가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은 그에 의해서 축귀 현상이 발생했다는 의미이다. 요즘 우리가 무당의 역할을 그렇게 보고 있듯이 율법학자들의 전통에 의하면 이런 일들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는 귀신 들린 사람인 게 틀림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이해가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예수의 삶은 악한 영과의 대결이었다. 그 악한 영이 때로는 사람의 몸을 파괴하기도 하고, 사람의 관계를 허물기도 하고, 사람의 내면세계를 황폐화하기도 하는데, 예수는 그런 악한 영의 능력을 근원적으로 제압했으며 해체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이런 생각을 유치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술적인 세계관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이 삶을 파괴하는 힘을 악령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늘 약간의 과학적인 공부를 거친 사람들의 눈에 이들의 세계관이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가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나은 것처럼 보일 뿐이지 이 세계의 궁극적인 실체를 모른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엄밀하게 본다면 과학과 주술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어쨌든지 예수가 누군가 하는 질문은, 즉 기독론은 악한 영과의 투쟁에서 그 정체성이 확보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세례 요한의 설교가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덕적인 색깔에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예수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이유는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이 근본적으로 영적인 차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오늘의 교회가 도덕과 윤리와 복지와 휴머니티를 외친다면 교회의 외형이 어떻다 하더라도 이 세상이 수용하겠지만 영의 본질을 외친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지만 요즘 약간 지성적인 교회는 꾸준하게 세례 요한의 설교를 추구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썩 괜찮은 삶의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요한의 설교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교회는 결코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인간 삶의 외형적인 변화보다도 그 근원인 영성의 깊이가 교회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약간 이상하게 보는 한이 있더라도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은 그 영의 문제를 고대의 주술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 시대의 세계관은 그것으로 역할이 끝났으며, 오늘 우리는 전해 새로운 세계관으로 살기 때문에 영의 문제가 오늘의 언어와 개념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오늘 교회가 투쟁해야 할 악령의 모습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적 통찰은 당연히 요청된다. 물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인지 이해하고,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레벨:6]유희탁

2006.03.08 10:29:38

또하나의 숙제가 주어졌네요...
영적인 싸움에 대한 것들은 조금 다를 지 모르지만 무속적인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상황이나 우리의 조상들의 사고가 별반 드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감사합니다...

[레벨:0]aldnaldn

2006.08.11 19:10:17

영성 그것이 제게 문제입니다 믿을려니 주술같고 안믿을려니 신앙자체를 받아들일수없고 초신자의 고민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8.11 23:39:42

aldnaldn 님,
반갑습니다.
처음이시죠?
닉네임이 어렵네요.
영성이 주술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들의 시를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어요.
시인들도 나름으로 영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물과 일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주의 은총이.

[레벨:11]권현주

2006.08.19 11:43:52

도덕적이다라는 것은 이미 기존질서에 순응해가는 어떤 가치를 내포하니까
미쳤다는 비판으로부터 비켜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모세의 후손이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수,
그래서 규정하기어려우니 미쳤다고 몰아세우는 그 당시의 지식인들...

율법에 갖히지않는 어떤 영적 경지를 견지하며
삶의 자리에서 영이 활동하게 준비하며 나아간다는 것은
긴장되면서도 자유로울듯 합니다.
서늘하도록 긴장되는 글입니다.

[레벨:2]둘로스

2007.12.30 06:48:35

성경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당시 저자들의 세계관이 주술적이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리면 성경의 권위 자체가 해체되어 버리지 않을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인들의 세계관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그 사람의 해석이 맞다는 보장도 없고 또한 같은 시대 사람들이라도 경험에 따라서 관점은 다르므로 누구의 해석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있을까요? 영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그 시대의 세계관에서 어쩔 수 없는 묘사로 단정지으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결국은 네가 알아서 깨닫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인데요....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푼다는 방식에 의해 해석되어질 수도 없고.....성경이 나를 해석하는 것인지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인지..어쩔 수 없이 해석의 과정에서 자신의 교육과 경험에 의해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궁극적으로 계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사족을 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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