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25:8-17, 평화 통일의 희년을 맞으며

조회 수 4365 추천 수 26 2008.08.05 21:29:47

 <앞으로 당분간 지난 설교를 이 자리에 올리겠습니다. 현풍제일교회에서 행한 설교들입니다. 정용섭)

 

1995.1.1. 

평화와 통일의 희년을 맞으며 (레25:8-17)


1988년도에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KNCC)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고 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한 후 만 8년이 흘렀다. 오늘은 대개의 한국교회와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 소속 교회,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 소속 전세계 교회가 다 함께 ‘희년맞이 새해예배”를 드리는 뜻깊은 날이다. 한국교회가 8년 전에 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한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1945년에 해방이 되긴했지만 타의에 의해 남북으로 나뉜 이 분열의 역사는 어떻게 보아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역사가 아무렇게나 흘러가도 교회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특히 민족적인 고난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남북분열을 결코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남의 일 처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평화가 삼천리 반도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을 비록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수하려는 것이다. 이 일은 일제시대 때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던 일과 별로 다르지 않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일신상의 시련을 당하면서도 항일운동에 열심이었던 것 처럼 오늘 우리는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해 불이익을 받아도 좋다는 각오로 살아야 할 것이다.

희년이란 유대인들이 지켜온 가장 소중한 율법 중의 하나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수양의 나팔’이란 뜻을 갖고 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거나 승리의 신호를 가리키는 것 처럼 수양의 나팔을 불게 되는 희년은 유대 나라의 모든 질서가 원상태로 복귀하는 기쁨의 날이다. 희년은 근본적으로 안식일 제도로 부터 연유된다. 육일 동안 일하고 일곱 번째 날은 쉬어야 하는 안식일 제도로 부터 안식년과 희년이 이어진다. 일곱번 째 해를 뜻하는 안식년은 희년과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다. 예컨데 육년 동안 농사를 지은 땅도 칠년 째는 휴경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만 쉬는게 아니라 땅 까지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이를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이런 것을 볼 때 이미 유대인들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전제 우주의 평화를 모색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쉰다는 것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게 아니라 더욱 큰 창조를 위해 힘을 축적하는 기간이다. 오늘 우리는 경쟁심에 근거해서 진정한 휴식을 모르고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있다. 안식일과 안식년에 이어지는 희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더욱 엄격한 사회변화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제도이다. 7이라는 숫자가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7의 7배에 해당하는 49년 다음의 해인 희년은 가장 거룩한 의미를 부여한다. 50번 째의 해를 ‘희년’이라고 부른다. 이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축제가 임박했음을 알리기 위하여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분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이런 기쁨의 축제가 필요하다. 희년의 축제는 복권에 당첨되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됨, 그 인간됨의 자유를 충만하게 느끼는 때이다.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예를 들자면 50년 전에 일제로 부터 해방되던 그런 날 정도라 할 것이다.

희년에 대한 설명이 레25:8-24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강조되는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모든 사람에 대한 자유이다. 10절의 말씀을 읽어보자.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사건을 통해서 자유가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도 종과 주인의 관계가 형되었지만 그런 주종관계를 허물어 뜨리는 제도가 바로 희년이었다. 그래야만 할 수 없이 종의 신세가 되었어도 어젠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희년은 상실되었던 자유가 회복되는 날이기 때문에 기쁨의 나팔을 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가족 마다 즐거움과 만족으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진 완전한 휴식이다. 노동자나 나그네들이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때가 희년이다. 셋째는 땅에 생명의 근원을 두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휴식이다. 11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즉 땅이 생명력을 복원할 수 있도록 주기에 따라 자유를 허락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강조점을 종합해 본다면 인간과 자연의 평화와 자유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강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악한 구조를 주기적으로 갱신하므로써 가능한대로 이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어 버려고 하였다. 인간 세상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쩔 수 없이 계급이 생기고 부가 편중되고 사회 메카니즘이 인간을 억압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는 소위 제삼세계나 저개발 국가만이 아니라 가장 민주화되고 선진화된 나라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세계에 적용된다. 미국에도 극빈자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아무리 사회복지 제도를 통해서 해결해 보려고 해도 생존의 위기를 당하는 국민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성서적 전통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좀더 역동적으로 사회의 정의를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이다. 희년제도를 오늘 일률적으로 시행할 수는 없지만 희년정신이 살아있는 사회가 되도록 진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희년 정신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남한과 북한의 통일 문제를 이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앞서 레위기서에서 가리키고 있는 희년의 근본정신이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가족끼리의 즐거운 만남, 그리고 생명의 근원인 땅의 휴식이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의 통일은 바로 희년정신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남과 북에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일들이 바로 희년에 일어나야 할 일이다. 남과 북이 서로 적대적으로 대한 생각들이 허물어져서 형제애를 회복하게 된다면 그것 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다. 남과 북이 군사비로 지출하던 비용을 모두 청소년들의 교육과 노인복지, 그리고 맑은 물 살리는 일에 투자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모두 수양 나팔을 크게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이 적대적 관계를 아무리 생각해도 당연한 것으로 미루어둘 수 없을 정도로 시일이 많이 지체되었다. 자그만치 50년 동안이나 우리는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서 싸워온 셈이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도 통일을 이룬 마당에 아무 죄도 없는 조선 사람들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겪으로 허리가 두동강 난 채로 50년을 버텨돈 걸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통일이 서두른다고 빨리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연하게 기다릴 수만도 없는 문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년의 전통 가운데서 남과 북이 한 가족 처럼 기쁨으로 함께 춤을 출 그날이 속히 다가오도록 진력해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는데,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출세하는 문제가 시급하지 통일이 뭐 그리 대수인가 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불편하게 하나도 없는 마당에 <통일, 통일> 해봐야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아무 소용 없는 일이 아니냐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자기 식구 먹여 살리기도 힘든 판에 통일 운운 하는 것은 배불러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휴전선과 멀리 떨어진 탓인지 통일 문제를 남의 일 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소위 식자들도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90년도를 전후 해서 전개된 재야의 통일운동에 대해 비아냥 내지는 냉소적인 눈길로 바란본 정치가, 교수, 유명 소설가들이 있었다. 아마 그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일텐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1995년을 통일희년의 해로 정했으며, 왜 그 일을 위해 투쟁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통일의 희년을 언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구약성서에 희년이 명령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자세를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이념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그분의 질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처리해 나가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사회전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의 힘을 쏟으려고 하는 것이다. 남북이 갈린지 50년째를 맞는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보다도 <남북통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기도해 왔다. 갈라진 것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희년인 95년이 바로 이제 시작되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얼 해야만 할까? 이번 주 <비슬칼럼>에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우선 “회개”로 부터 금년 한해를 출발해야겠다. 별로 마음에도 없이 감상적인 차원에서 눈물, 콧물 흘리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헬라어 “메타노이아”가 뜻하는대로 전적인 삶의 방향전환을 결단해야 한다. 50년 동안이나 형제들과 헤어져 살아왔으면서도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고, 심지어 상호간 불신만 키워온 것에 대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지금 까지 겉으로 성장하는 일에만 몰두하였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쓰라린 통일문제를 부둥켜 안지 못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나 할 것 없이 통일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 통일이 되면 그때 평양에 가서, 신의주에 가서 교회를 세우겠다는 계획만 갖고 있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무슨 책임 있는 일을 할 생각은 않고 교회확장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 우리의 자세를 회개해야 한다.

다음에 우리는 구체적으로 남북평화를 위한 프락시스를 모색해야만 한다. 작게는 우리 자녀들에게 남한과 북한이 더불어 하나의 민족이라는 민족정신을 강하게 심어주어야 하며, 나아가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8.15 때마다 거행하는 통일 인간띠 잇기 대회 같은 일에 우리가 참여해야 한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얼마 전만 하더라도 북한과 미국, 혹은 일본 사이에 운동시합이 벌어지면 많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이나 일본을 응원했다. 그건 참 불쌍한 현상이다. 물론 북한은 우리 보다 훨씬 경직되었고 훨씬 편향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까지 그렇게 속좁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만 아니라 지방의원이나 국회의원을 선거할 때 이런 민족적인 비젼을 갖고 있는 후보자들을 선택하는 일도 그에 해당할 것이다.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남한과 북한이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서로간에 신뢰심을 키울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는 일이다. 6.25 전쟁을 일으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그놈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던 45년 전과 지금과는 상황이 전혀 다른다. 이제는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서 UR이니, WTO니 하는 경제전쟁의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공헌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서로간 이해와 신뢰의 관계를 돈독히 해 나가야 한다. 현실적으로 남한은 자본주의이고 북한은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서로간 다른 이념으로 인해서 이해의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멀리 내다 볼 수 있어야 한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북한의 사회주의가 하나의 민족 안에서 어떻게 상극(相剋)관계가 아니라 상생(相生)관계로 돌입할 수 있는지 서로의 자리를 뒤돌아보고 대안을 찾아나서야 한다.

1995년은 상당히 오랫 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한해로 기억될 것이다. 평화와 통일의 희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역사에 남을 것이다. 우리의 후손은, 특히 우리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남북분열 50년째를 맞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통일의 나팔을 불자. 수양의 나팔을 불자. 50년 전 해방의 기쁨을 기억하고 통일의 길을 힘차게 열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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