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8-11, 믿는 자의 충성

조회 수 6214 추천 수 24 2008.08.05 21:34:41
 

1995년1월8일 

믿는 자의 충성 (계2:8-11)


요한계시록 2,3장에는 그 유명한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관련된 말씀이 나온다. 지금의 터어키 지방인 소아시아에 일곱 개의 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곱이란 숫자가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거룩한 의미를 뜻하기 때문에 일곱 개의 교회가 선택된 것 같다. 그 교회들의 이름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인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해당하는 교회는 서머나이다. 루시안은 서머나가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고, 웅변가 아리스티데스는 서머나를 “무지개와 같이 구석구석이 펼쳐지는 우아함과 그 빛남은 사방에 차고, 호머에서 보듯이 번쩍이는 병기의 광채”라고 노래했다. 서머나는 로마에 충성을 받치는 도시로 유명했는데, 기원전 195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로마 여신과 로마신을 위한 신전을 세웠으며, 기원후 26년에는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이 디베리우스 신전을 지을 영예를 얻으려고 경쟁할 때 에베소 까지 물리치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서머나는 산업, 도시미, 정치, 종교의 우월성으로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지식과 예술에 있어서도 역시 유명했다. 유명한 운동경기가 매년 거행되는 운동자, 웅장한 공공 도서관, 오데이온이라 불렸던 음악당,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극장이 있었다. 또한 서머나는 모든 희랍 도시에서 공통적인 특징으로 나타나는 사치와 허영이 강하기도 하였다.

서머나가 초기 기독교와 연관된 가장 중요한 일은 서머나의 주교였던 폴리캅이 155년 2월23일 토요일에 그곳에서 순교를 당한 사건이다. 그의 순교는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운동경기가 열리는 시즌에 서머나에는 많은 인파가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런데 흥분한 군중 중에서 “무신론자들을 없애라! 폴리캅을 찾아라!”는 외침이 들렸다. 고문에 못이겨 자백한 한 어린 노예에 의해서 밝혀졌다. 그들이 폴리캅을 체포하러왔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원하는대로 모두 내어 주라고 했다. 치안 책임자는 폴리캅이 죽는 것을 바리지 않아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 이렇게 충고했다. “이제라도 가이사가 주(主)라고 선포하고 그에게 제물을 드리면 죽음을 면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쁠게 무엇이오?” 그러나 폴리캅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이십니다.” 그가 원형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오기를 “폴리캅아, 굳세어라. 그리고 남자답게 싸워라!”고 했다. 지방 총독은 마지막으로 폴리캅에게 살아날 기회를 주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하고 가이사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폴리캅은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86년간 그리스도를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나를 구속해 주신 내 왕을 욕하겠오?” 총독이 그를 불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캅은 말하기를 “당신이 잠시 타다가 곧 꺼져 버리는불로 나를 위협하나, 이는 당신이 다가올 심판날과 영원한 형벌에 악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불을 알지 못함이요, 무엇 때문에 지체하는 겁니까? 자, 어서 와서 하고 싶은대로 하시오.”라고 했다. 군중들은 목공소나 목욕탕에서 땔 나무를 가지고 몰려들어서 폴리캅을 기둥에 묶으려고 하자 “나를 내버려 두시오. 불을 견뎌내도록 힘을 주신 그 분이 나에게 이 불길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게 하여 주실 것이오.”말했다. 사람들이 폴리캅을 느슨하게 묶은 채로 불을 질렀으며 폴리캅은 기도 가운데서 순교당했다고 전해진다.

요한 계시록은 폴리캅이 순교하기 전인 기원후 95년경에 기록되었지만 폴리캅 시대에 못지 않게 기독교 신앙을 소유한다는 것이 매우 위험스러운 시기임에는 틀림 없다. 그리스도 교회의 초창기, 그러니까 사도시대 때는 오히려 큰 박해는 없었다. 유대인들의 적대행위가 있긴 했지만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지중해 연안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관리들이 비교적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그런데 황제숭배가 본격화 되면서 그리스도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데 되었다. 특히 도미티안 황제(96-98)가 즉위하면서 황제예배를 모든 식민지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던 교회는 말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게 된다. 그는 법령을 고쳐서 자기를 신으로 지칭하라고 하고, 지방장관 전원에게 정부의 공문서 첫 머리에 반드시 “우리들의 주시며 신이신 도미티안 황제의 명에 따라...”라는 서두를 달게 하였다. 흡사 북한에서 항상 “우리의 친애하는 김일성” 운운 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로마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도미티안을 신이라 불러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와 배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로마와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도 없었다. 실제적으로 많은 노예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었다. 힘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질서를 전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저들에게 진정으로 복음이 되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만 인간이 됨을 절감했을 것이다. 출신이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인데다가 로마가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상황이 되어서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한 계속적으로 약탈을 당하고 가난을 면치 못하고 심지어는 투옥되거나 죽어야만 했다. 흡사 중세기 때의 집시들과 같은 운명이 그 당시의 기독교인의 운명이었다. 요한은 다가오는 위기 가운데 놓여 있는 그 교회 공동체를 위로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요한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주는 말씀은 놀랍게도 “죽도록 충성하라.”이다. 어려움이 왔을 때 믿는 자들이 취할 태도는 잠시 물러서는 게 아니라 변치 않는 충성이다. 군인들이 거수 경례를 할 때 보통 “충성”이란 구호를 외치는데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각오가 그 말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처럼 군인들이 국가를 위해 충성하듯이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는데 달려있다. 충성하는 사람은 자기의 사적인 일을 다 마치고 나머지 시간으로 대충 챙기거나, 아니면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지만 가능한대로 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충성스런 군인은 아무리 자기 집안 일이 급해도 국가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뒤로 미루어 두는 것처럼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일에만 마음을 쏟는다. 초기 기독교는 기이사 앞에 경배하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경배하는가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세상의 뜻에 따라 사는가의 두 경우만 있지 그 중간의 입장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를 엄밀한 신앙의 저울에 올려놓는다면 거의 세상의 뜻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때에 따라 하나님을, 때에 따라 세상을 섬기며 살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결국 세상에 속했다고 보아야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우리는 나름대로 신앙의 형식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그것이 곧 신앙의 척도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기도나 찬송, 교회 봉사 등, 이런 것들은 모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형식들인데, 이런 것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에만 머물러 있을 경우에 우리는 전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만다. 기독교 신앙의 형식에는 매우 익숙한데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매우 낯설다. 그냥 겉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 같이 보이긴 하지만 속마음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별로 다른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충성하고 있는가 자문해 보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그러나 실제 삶의 내용에 있어서는 세상을 추종한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는가 하고 말씀하셨는지 모른다. 우리는 아무도 진실한 의미에서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인격, 우리의 전체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에 얼마나 진지한가에 달려있다. 우리의 충성은 “죽도록”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항상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가이사 숭배를 강요하던 로마의 핍박 밑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던 초기 공동체의 경우와 같이 죽음에 직면한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나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결국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씀이다. 요한도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하되 “죽도록” 하라고 서머나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서머나 교인들은 이 말을 우리 보다 몇 십배 이상 잘 이해했을 것이다. 9,10(전)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머나 교인들은 실제로 가난했고, 여러 가지 위협 가운데 놓여 있었으며, 예컨데 실직, 유대인들의 노골적인 핍박, 투옥, 순교 등의 위험이 늘상 주변에 있었다. 이런 근심스런 일에만 마음을 쏟고 있다 보면 사람은 약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가이사를 주(퀴리오스)로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대로 “죽도록 충성할” 각오를 한 사람이라면 시련들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드러내 놓는가 아니면 그 뒤에 숨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초기 교회는 이런 신앙으로 순교를 불사하며 예수님을 증거하였다.

오늘 날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순교의 시대에 살고 있진 않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고 결정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더구나 순교를 당하는 경우는 없다.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도 역시 자기의 의지만 있다면 기독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오늘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은 아주 간단한 데서 시작한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다. 순교가 없는 시대에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자기를 부정하고 충성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많은 문제들이 자기를 너무 강하게 의식하는데 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는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으니 아무리 겉으로는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정말 참된 평안과 안식이 생겨날 리가 있는가? 어제는 전기대학 입시 원서마감일이었다. 매년 이맘 때만 되면 남한 천지가 야단북새통이 된다. 당사자 학생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동원되어 될 수 있으면 지원율이 낮은 대학과 학과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요사이는 무선전화 까지 동원된다고 하는데 대학 원서 하나 제출하는 게 흡사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 이동통신 주식을 판다고 하니까 해당 은행 창구가 무너질 지경이고,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아파트 분양 신청 장소에도 인산인해였고, 명절 기차표를 예매하는 날은 전날 밤 부터 나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우리의 삶이다. 좀 조용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 대학 입시만 해도 그냥 내신 성적만으로 평가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때로는 우리가 경쟁도 하고 열심을 내기도 해야 하지만 매사가 이런 모양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도 모습도 역시 이런 차원에서 한발자국도 앞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지난해 스님들이 절간에서 난투극을 벌인 적도 있지만 그게 다 무슨 일일까? 기독교도 역시 얼마나 서로 부질없는 일로 경쟁하는지 모른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서로 자기네 교파 이름을 높히 드날리는 것만을 자랑으로 여긴다. 우리 교회가 교회당 건축을 계획했는데 앞으로 어떤 교회당이 건축될지 모르겠지만 이게 우리의 명예심을 나타내려는 기회가 될지 않도록 모두가 자중해야 할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하라. 그들은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부인하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어떤 사람이 자기의 왕국과 심지어는 온 세상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기적이라면 그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면 그가 무엇을 갖고 있든지, 그것이 부이든 명예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그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교회 봉사를 “죽도록 충성해 보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봉사하라는 말이다. 이게 순교적인 신앙의 자세이다. 교회봉사란 하나님의 일 중에서 아주 작은 것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봉사를 해야 얼마나 하겠는가? 충성이란 말도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나름대로 추구하는 교회봉사가, 우리의 온 힘을 기울인 충성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목사가 교회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자기가 살아있는 한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목사가 아무리 억지스런 방법을 쓴다 해도 무언가 업적이 있기만 하면 좋다고 부추긴다. 교회봉사를 하면서 자기를 인정해 주면 무언가 열심을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큰둥하게 여긴다면 그건 참 기독교 신앙으로 부터 멀어도 한참이나 멀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죽도록” 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충성할 수 있다. 그럴 때만 우리는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평안할 수 있으며 자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죽도록” 충성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곧 순교자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오늘 순교가 없는 시대에 순교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믿는 자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며 충성한다. 그런 이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고 주님은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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