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6:5-11, 죄 의 심판

조회 수 5773 추천 수 30 2008.08.07 16:26:02
 

1995.1.29. 

죄, 의, 심판 (요16:5-11)


하나님은 어떤 사물처럼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책이나 돌이나 꽃처럼 우리가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을 산신령쯤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런 아마 보다 넓은 존재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장성한 그리스도인들마저 그런 생각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없고 다만 간접적으로 그분의 활동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은 실체가 아니라 다만 공기의 이동입니다. 누가 바람을 잡으려 한다면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활동함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그것이 바로 그분의 존재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활동에 참여해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매우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령>입니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입니다. 그 성령은 위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것처럼 바람과 같아서 실체가 아니라 활동으로서 존재하십니다. 성령의 활동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7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오히려 유익인 이유는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조건 안에 계셨던 예수님이 그대로 머무셨다면 그분이 거하는 한계 안에서만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보혜사 성령이 오시므로 시공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분은 어떻게 존재하십니까? 요한은 8절에서 보혜사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죄와 의와 심판은 서로 관련된 문제인데 이 세 가지 주제가 바로 성령의 핵심적인 작업입니다. 요한이 이 세 가지 주제에 대해 9-11절에서 보충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역사는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첫 머리는 창조기사로 시작합니다만, 곧 이어 인간의 죄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던진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놓고 볼 때 그분께서 인간의 죄를 얼마나 시급한 문제로 간주하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죄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그 진정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죄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죄라는 말이 매우 자주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죄에 대해서 진지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결국 죄 문제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종의 도피주의입니다.

우선 세상 사람들이 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들은 자기와 죄 사이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죄를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기분 나쁘게 여깁니다. “도대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내가 죄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입니다. 이들은 죄를 단순히 부도덕한 행위나 범법행위로 생각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잘못된 행위가 없는 경우 결코 자기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판사에게 유죄선고를 받지 않는 한 어떤 행위라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작년에 12.12 사건과 5.18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합법적이라고 항변하였으며, 성공한 혁명이기 때문에 정죄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정권을 가진 사람들도 역시 그런 일을 역사에 맡기자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죄 문제가 아니라 누가 권력의 헤게모니를 갖는가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93년도 여름에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 이후로 공직에서 물러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며 기회가 오면 다시 정권의 곁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처럼 외치던 이들이 뒷구멍으로는 전국 곳곳에 알짜배기 땅을 사들였으면서도 “토사구팽” 운운 하면서 절치부심하고 있는 걸 보면 죄의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느껴집니다. 우리는 반사회적 행위를 모두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역사에 맡길 일도 있고 너그럽게 아량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죄의식의 단절입니다.

반면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치게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종의 숙명주의입니다. 인간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두운 죄의식 속에서 참된 자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이들일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기도만 하면 우는 사람들, 부흥회 때마다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들, 말만 나왔다 하면 “내가 죄인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는 거야 어디 나쁠 게 있겠습니까만 죄에 대한 숙명주의는 또 하나의 다른 도피주의입니다. 죄가 많다고 하면서 그걸 고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똑 같은 죄를 짓습니다. 습관적인 회개, 감상적인 눈물을 신앙으로 생각한다면 성서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더 나아가 그 죄를 극복하게 해 줍니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인 성령을 믿고 사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죄의식을 내팽개치고 살거나 혹은 죄를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의 생각과 행위가 죄인지 아닌지를 냉철하게 판단하며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9절). 도둑질이나 간음을 죄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부도덕하게 살아도 예수님만 믿으면 다 좋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가 근본적으로 진리인 예수님,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보시는 게 아니라 속을 보신다는 말씀처럼 우리의 의도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겉으로 몇 가지 그럴듯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죄로 부터 자유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중심이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 더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없는 것을 우리는 죄라고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이 바로 믿음입니다.

둘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앞서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말한 것처럼 의에 대해서도 무관심 합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갑니다. 세상에서는 의를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일부의 특별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며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악하지 않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솔직히 이 시대를 바라보면 오히려 의롭지 않아야 이 세상에서 견뎌낼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삶의 기준이 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지 않고 출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행위, 그것은 정치, 경제, 교육에 이르는 전반적인 인간의 문화 활동인데, 그 모든 행위는 의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이에 반해 한쪽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대개는 종교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자기를 합리화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점점 더 세속의 생활을 포기하고 순전히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에만 매달림으로써 세상 사람들 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과연 의로운 것일까요? 앞의 사람들이 의에 대해서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반면에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만 매우 오해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세상 사람들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이나 진정한 의미에서 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무슨 말씀입니까? 의는 다른 데 있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놓여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정치와 유대의 종교세력은 예수님을 불의하다고 간주하고 십자가에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 십자가는 모든 이들에게 치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불의하다고 저주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이 바로 의로움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의 기초이듯이 의로움의 기초 역시 예수입니다.

셋째, 성령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우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심판에 직면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심판을 두려워하면서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일을 살펴보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악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악이 오히려 승리할 때도 있으며 반대로 선이 더욱 큰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항상 바르게 집행된다면 그런 억울한 일들이 없어야 할 텐데 세상일은 하나님의 심판과 별로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궁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의 결과를 즉시 확인하려고 합니다. 착한 일을 하면 즉시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즉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임하는 궁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다볼 수 없는 그런 시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준엄하게 집행됩니다. 악은 스스로 그런 시간들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속성을 갖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잘되는 것 같지만 결국 심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하는 한 가지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 악에 속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하게 그 사람이 잘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판단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판단은 그 사람의 내적인 세계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 선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잘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 그분 때문에 우리가 선한 생명에 참여한다고 하는 사실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겉으로 멋지게 보여도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욱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피로하게 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더욱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힘들어 합니다. 이것 더 큰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무감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걸 의식한다고 해도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걸 깨닫게 합니다. 죄와 의와 심판을 알고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속한 이들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살지 맙시다.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는 것은 성령뿐입니다. 거룩한 영인 생명의 영입니다. 그 영에 마음을 열어두는 사람들은 죄와 의와 심판 앞에서 책임감을 갖고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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